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대승적 차원' '대승적 견지' '대승적 입장'과 같은 용어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다. 이때 '대승'은 '대승불교'의 그 대승을 말한다.

대승(大乘)은 소승(小乘)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아니다. 인도문화가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산맥에 막혀 간다라를 경유하게 된다. 간다라는 지금의 파키스탄 북서부 페샤와르 지역으로 BC 1세기부터 AD 6~7세기까지 독특한 불교예술이 꽃피었던 곳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관문이면서 불교를 비롯한 인도문화를 외부 세계로 전파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간다라를 통해 중국으로 수입된 불교는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 칭하는 인도불교와는 성격이 달라졌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은 인도불교는 '소승불교', 자기들의 불교는 '대승불교'라 불렀다. 그러나 정확한 명칭은 소승불교가 아니라 '남방불교'라고 해야 옳다.

남방불교는 개인의 해탈과 엄격한 종교성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대중교화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보살심의 발현에 방점을 둔다. 대승의 대(大)는 영원무궁한 시간성과 광대무변한 공간성으로 곧 사람의 마음 크기라면, 승(乘)은 이를 실어 나르는 수레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을 위해 나에 대한 이기적 집착을 버리고  '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이 깨닫지 못했더라도 타인부터 인도한다)'의 대자대비한 보살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탐진치로 가득 찬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대승이란 참으로 힘든 가치다.

이번 문재인 정부의 인사청문회에서 유독 많이 들리는 말이 "대승적 차원에서 협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인간이건 정당이건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익을 위해 적절하게 계산하고 조절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자신에게 불이익을 될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이를 대승적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을 보고 정작 '대승(大乘)'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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