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거제향토사학자

포로수용소, 처참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적 역사속 우리의 유산(遺産)이다. 실체는 사라진지 오래고 비운의 역사를 증언하는 돌담의 벽만이 그날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아픔의 자국은 시간이 지나며 역사의 증거로, 후손의 교훈으로, 이제는 지역의 관광콘텐츠라는 이름까지 얻으며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이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가 지금 후손들에 의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등재라는 영광을 얻기 위한 과정속으로 들어섰다.

오늘의 주인공 이승철(78)씨와 이 돌담벽은 인연이 깊다. 돌담벽의 입장을 말한다면 '은혜입은 까치'정도가 될 성 싶다. 그는 거제향토사 전문가다. 우리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고증하려 하고 알려주려 한다. 젊어서부터 이어진 연구의 결과들은 수많은 자료로 녹아들어 그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지난 2015년엔 거제시에 그의 기록과 자료 300여점을 기증했고 그 공로가 인정돼 거제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합천 출생인 그는 68년 거제로 들어왔다. 카메라를 다룰 줄 알았던 그의 재주는 그를 당시 거제군청 문화공보실로 이끌었다. 인연의 끈은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당시의 시대상이 그러하듯 전쟁의 상처를 씻고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의 열망은 불도저 같았다. 그때는 문화도 관광도 가치(價値) 밖에 있었다. 그에게 현실은 안타까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1977년 6월 첫째 토요일, 거제군 공보실에서 문화유적을 담당하고 있는 그에게 전화가 한통 걸러 왔다. 마지막 남은 포로수용소 담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수많은 문화재가 쓸려 내려가고 허물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그 담벽은 누구에게도 상징성을 가지지 못했다. 그를 제외하곤.

그는 "당시 고현고등학교가 고현기술고등학교로 전환되며 포로수용소 잔해는 헐어버렸고 이어 고현중학교를 신설하면서 나머지 잔해도 없애버릴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며 "공사를 한다는 전화에 곧장 뛰어나가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중요한 건물이니 이 부분이라도 살려둬야 한다고 고함을 질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사담당자의 욕설과 구둣발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윗 직책의 어른들에게도 그건 그냥 많고 많은 시멘트 덩어리일 뿐이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동안 공보실에 있으며 인명(人名)식을 익힌 동아대학교 박물관장이며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동호 교수를 찾아 자석식 전화기를 돌렸다.

다음날로 김 교수와 박정인 부산일보 정치부 기자가 거제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틀 뒤 부산일보엔 '포로수용소 유적지가 도자의 이빨에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고 돌담벽은 생명을 지켰다.

경상남도에선 공사 중단명령을 내렸고, 문화재 가지정(假指定)을 이뤄내며 지방문화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돌담벽에 생명수를 부었다. 돌담벽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그는 "역사의 무수한 주인공 뒤엔 무명의 민초 주인공이 있다. 오늘날 포로수용소의 돌담벽이 누구에 의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라면서 "이 아픈 역사를 지키려고 했던 나의 행동들이 유네스코 등재라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기쁜 소식들로 날아드니 스스로 대견하고 보람된다"고 말했다.

또 "다만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 민초의 주인공은 존재하지도 않은 듯 영광만을 차지하려는 이들의 모습이 비치는 것에 씁쓸함이 들 뿐"이라는 말로 속내를 드러냈다.

지금도 못다한 향토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그의 노구(老軀)는 여념이 없다. 그는 "열심히 뛰고 있는 후배와 동배의 향토학자의 우리 것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산다"면서 "이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역사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로 인사를 전했다.

자신을 지키려고 애썼고 지켜냈던 무명의 주인공 손끝의 온기가 돌담벽에 닿는다. 조금은 그 아픔들이 삭혀지고 있는 것인지, 이 돌담벽이 안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하고픈 그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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