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 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두 사람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지만 서로 보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비 갠 후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진흙투성이의 땅을 바라보며 눈살 찌푸린다.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으며…" 했다.

그 땅은 우리가 올라가서 취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에 이들과 다르게 보고하는 자가 있었다.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했다.

둘 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한다. 그런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불가능을 보았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가능성을 보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앞에 있었지만 그 성읍이 너무 크고 견고했고 그 거주민이 너무 강해 보였다.

하지만 갈렙에게 있어서는 달랐다. 갈렙은 가나안 족속들의 장대한 모습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히 '올라가자, 올라갈 수 없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느냐,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은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나머지와 회중들은 밤새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그러다가 우리가 이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서서 창밖을 내다볼 때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흙투성이의 바닥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도 있고 즐거운 일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만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기 다르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바로 파악할 줄 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들은 애굽의 그 강한 바로 앞에서도 당당하게 금 은 패물을 요구하여 나왔다. 홍해를 걸어서 건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 그들 앞에 가나안 족속의 강약이 문제가 되었겠는가? 가나안의 성읍이 얼마나 견고하고 그 주민이 얼마나 장대한 백성인가가 문제였겠는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앞에 강한 군대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였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래서 10명의 믿음 없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강하게 외쳤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 앞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가나안이 아무리 튼튼하고 견고한 요새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들의 강함도 장대함도 견고함도 바람 앞의 겨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현실에 집중하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제는 눈을 들어 진흙투성이의 땅이 아니라 하늘을 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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