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섬 지심도, 일제의 흔적을 걷다

지심도, 일제의 흔적을 걷다

지심도는 오랜 기간 거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섬 주변은 온통 바위절벽이라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고, 천연의 요새인 지형과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한 일제가 군대를 주둔시켜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해방 이후에는 국방부 소속의 섬으로 있다가 거의 100여년 만에 거제 시민의 품으로 완전한 반환을 앞두고 있다.

지심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이곳의 자연환경에 먼저 주목한다. 동백나무를 비롯해 수십 종의 희귀한 나무들이 우거졌고, 주변 남해안을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섬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바다 대한해협의 길목에 있는 지심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파악한 일제는 1936년 섬 전체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얼마되지 않은 주민들이 쫓겨난 자리에 포대와 탄약고, 서치라이트를 보관하는 벙커, 발전시설 등이 세워졌다.

전후 지심도의 일본군은 떠났지만 설치된 포대와 탄약고 등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관광객들의 볼거리가 되고 있다. 관광객을 상대로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주민들이 사는 집 중에서도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다.

▲ 지심도에 일제가 건설한 포진지

지심도의 가혹한 운명

일제는 지심도에 초대형 서치라이트 관측소를 지어 대한해협을 관측하고 장거리 사정포대를 통해 주변 바다를 봉쇄했다.

대륙과 대양 진출의 중간 거점이자 병참기지가 된 한반도는 수많은 병력과 물자가 오갔는데 대부분 배를 이용했다. 그 길목이 있는 지심도는 섬이 크지 않으나 길어서 항공기 이착륙이 가능하고 해안선은 절벽으로 이뤄져 천연의 요새역할을 했다.

일제가 건설한 포진지는 섬의 남쪽에 배치돼 대한해협을 직접 겨냥했다. 포대에는 사정거리가 긴 45식 캐논포가 배치됐다. 1938년 설치됐다는 서치라이트는 직경이 1.5m에 달했고 당시에는 최첨단 기기였기에 보관하는 시설도 웅장하게 지었다.

포진지는 대포를 설치하는 포상과 그 옆에 있는 탄약고로 구성돼 있다. 콘크리트로 만든 포상은 직경이 7미터가 넘고 깊이는 1.5m 정도다. 양쪽에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고 가운데 부분은 대포를 거치하고 360도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탄약고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높아지도록 경사를 줘서 배수를 생각했다. 전국 최다우지역인 거제의 기후를 감안한 것이다.

입구는 녹슨 테두리에 경첩이 달린 흔적이 있어 두꺼운 철문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포탄의 무게가 40㎏을 넘었으므로 레일을 이용해서 탄약고에서 포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이 철수했지만 지심도는 국방부 소속으로 이관돼 이곳에 국방과학연구소가 들어섰다. 지심도는 보안을 유지하며 무기를 시험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지심도로 들어와 살았고 일제가 사용하던 연병장과 막사 터에 일운초 지심분교가 1954년 개교했다. 첫 학기 학생이 18명이었다는 지심분교는 1994년 폐교됐고 학교 건물은 마을회관으로 쓰고 있다. 이 건물은 막사 등 군사시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아 광복 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지심도에 일제가 건설한 탄약고 내부

지심도, 두 얼굴의 섬

지심도는 역사적으로 대중의 접근이 쉽지 않았기에 오랜기간 갖가지 풍문이 떠돌았고 이를 뱃사람들은 술자리 담화의 소재로 예술가들은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

지심도를 주제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전설은 팔색조에 관한 것이다. 동남아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이나 그 사실을 잘 몰랐던 뱃사람들에게 지심도 일대에 출몰한다는 팔색조는 경도의 대상이었다.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윤후명 선생은 소설 팔색조를 비롯한 그의 작품세계에서 지심도에서 인연을 맺은 한 여인과 팔색조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대에게 들려줄 말 있네/ 들려줌으로써 비밀이 되는 한 마디 말/ 있네// 그대에게 들려줌으로써 내가 지킬 비밀/ 가슴속 깊이/ 있네.'

이렇게 잊지 못할 경험을 털어놓겠다며 운을 띄우고는 섬 속의 섬에서 벌어진 일을 언급한다. 그는 "나는 분명히 팔색조를 찾아 그 작은 섬에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 나는 새의 딱딱한 부리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날 박제로라도 해서 갖고 싶으신가요? 그건 안 될 말이에요. 오늘밤만 우리는 서로의 것이에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도 이 섬을 빠져 나가지 못한 거에요"라고 적었다.

지심도의 팔색조를 아십니까

일부에서는 윤후명 선생의 위와 같은 서술이 당시 뱃사람들 간에 떠돌던, 위안소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분석도 한다.

일제가 주둔했을 때 1개 중대급이 상주했으므로 군인만 100명 이상이 있었고, 바로 앞의 장승포가 널리 알려진 유흥지였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상황이었던 제주도 성산일출봉에는 일제의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곳에는 콘크리트로 조성된 18개의 동굴진지가 남아 있다. 증언에 따르면 1945년 4월에 배치된 제45신요부대 군인들은 휴가를 받으면 위안소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거제지역의 한 어촌계장은 "일제가 물러간 뒤에 위안소의 여성들 중 일부가 한동안 지심도에 남았다는 풍문이 있다. 그래서 주변을 지나가던 뱃사람들이 놀다가 가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팔색조'를 보러 지심도에 가자는 은어를 썼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 국방과학연구소

지심도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현재 지심도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해방 이전부터 살았던 사람은 없기에 이 풍문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당시 장승포에 유곽이 있었고 지심도에 군인들이 꽤 많이 머물렀으므로 일부 여성들이 지심도까지 오갈 수는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기록으로 확인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심도의 팔색조에 대한 풍문은 기록 이전의 이야기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윤후명 선생은 소설 속에서 팔색조 전설의 실존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누군가 내게 그 섬에 팔색조가 오는가 안 오는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대의 마음이 영원히 그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자 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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