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 김계수 거제시외식업지부 사무국장

상처를 기억하는 좋은 방법은 상처 주위를 자주 눌러 주거나 마음에서 아물지 못하고 멀어져 간 옛 사람을 자주 생각하는 것이다.

모래알 품은 찬바람이 얼굴로 달려들어 눈 속에 몇 알을 남기고 사라진다. 한참동안 눈을 뜰 수가 없다. 눈동자를 움직일수록 고통은 더해지고 가만히 서서 눈물을 흘려 보는 수밖에. 흘린 눈물로 내 고통을 씻을 수밖에 없다.

아픔으로 흘린 눈물이, 눈물이 보듬은 아픔이 세월의 등을 잡고 얼마나 퇴적돼 있었는지, 쌓이어 무뎌진 상처와 기억들이 이 가슴에서 누구의 가슴으로 얼마나 흘러갔을지 궁금하다.

내게 발등이 큰 스무살 여인이 있었다. 운동화 대신 처음 신은 구두 밖으로 발등이 새어 나왔을 만큼 키가 나보다 컸다. 언젠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가 너무 커서 부푼 발등이 무거워서 도망을 쳤었다. 그냥 몰래 영화관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날 따라오지도 않았다. '무겁다'를 '무서워'로 읽었는데도 그녀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를 찾아오거나 찾지 않는다.

천진한 내 눈살에 찍힌 발등이 그녀에게 봄이 찾아오는 동안 내내 고통이었겠다 싶다. 자신의 발등을 보며 생기는 상처를 흐르는 눈물로 씻어 낼 수 있었을까 싶다. 아마 그러지 못하고 무거운 발등을 보며 상처를 묻어 주고 있었을 것이다.

눈 속에 들어 온 바람이 눈물로 나가고, 헛 눈물로 모래가 쓸려 나가니 너무 커서 슬픈 발등이 그렇게 작을 수가 없다. 너무 작아서 성한 눈이 종일 쿵쿵거린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에게서 다가오는 것과 내게서 지나가는 것의 사이에 머뭇거리는 상처를 한참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는 상처가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주면서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한다. 사랑하고 슬픈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아픈 환경이 치유되고 있다.

도대체 가슴 쿵쾅거리는 만남이 없어진 요즘 풋풋한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슬픔을 마음껏 발산하여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분노나 슬픔은 불행이 아니라 화를 내거나 슬퍼져서 일상의 혼란을 잠시 마비시키고 기분이 좋다는 착각을 가져다준다.

상처를 기억하면서 순간 푸릇해져 있는 젊은 나를 발견하게 되고 한순간 기운이 말끔해지는 착각이 든다. 너무 심해져 우울해지지만 않는다면 마음 챙기기에 꽤 괜찮은 방법인 듯하다.

온 나라가 제어하기 힘든 분노로 뒤덮여 있고 서로의 가슴에 가시를 수천 개씩 박아두고 있다. 썩어 없어지지도 않을 가시가 서로의 몸에 박혀 아픈 척도 않는다. 하지만 그 가시를 하나 둘 빼어내야 될 시기가 오면 그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가시는 뽑을 때 가장 아픈 법이고 뽑아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고통이 아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악을 끈질기게 찾아내 확산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악은 숨긴다.'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분이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풍경에 딱 맞는 말이다. 세상이 힘들고 어지럽다 한들 스스로를 토닥거려 줄만한 사랑을 잃고 살 수는 없다.

더 이상 가슴 뛰지 않는다고 여기는 마음은 사실은 스스로가 굳게 닫고 자물쇠로 채웠기 때문이다.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학대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다가 오고 있는 봄이 달아날까 염려된다면 모두 다른 사람의 악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상처 하나쯤 꺼내어 기억해 보았으면 한다. 피는 봄 꽃 위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는 여유만 있다면 가슴 쿵쾅거리는 엄청난 인연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설사 그런 인연이 오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서 치료할 수 있다면 말이다. 굳게 닫힌 것을 여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고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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