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반란
세탁기의 반란
  • 거제신문
  • 승인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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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화/계룡수필회원

기어코 일이 났다. 몇 주를 성난 맹수마냥 으르렁거리더니 울다 지쳐 돌이 된 듯 멈춰버린 것이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신혼 살림살이로 장만한 세탁기, 우리 집 빨래를 도맡아한 지 십 년이다. 남편의 작업복 주머니에 숨어 있던 작은 나사못, 볼트, 너트가 세탁기의 몸 속 구석구석 생채기를 내었고, 가리지 않고 돌렸던 옷들은 목구멍에 해묵은 찌꺼기를 쌓아 놓았다. 세탁기의 고장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았다. 거름망이 조금 찢어져 섬유찌꺼기가 옷에 묻었고, 처음과는 다른 기계음이 약간 들릴 뿐이었다. 그 옛날, 빨래를 치대며 입버릇처럼 웅얼거리시던 어머니처럼, 오래된 세탁기의 웅얼거림은 정겹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탁기가 세탁수위를 정확하게 맞추질 못했다. 물높이를 저수위로 맞추면 고수위로 차올라야 작동을 하고, 고수위로 버튼을 눌러놓으면 흘러넘치도록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작동하는 날에는 언제 다시 오작동을 일으킬까 하는 조바심에 단 하루 입은 옷가지들도 서둘러 세탁기에 넣었다.

그러길 몇 주, 드디어 그녀가 완전히 멈췄다. 이젠 나 몰라라 하듯 맥 놓고 앉아 있는 폼이 돌아 앉아 꿈쩍 않는 돌부처다. 발로 냅다 몇 대 차기도 하고, 플러그를 꽂았다, 뽑았다 명줄을 잡고 놓길 반복했다. 버튼은 무슨 몹쓸 벌레 한 마리 죽이듯이 짓이겨 놓아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세탁 중에 멈춰버린 옷들이 허망한 눈길로 얼기설기 엉키어 나를 올려다본다. 죄 없는 빨랫감에게 눈을 흘기며 괜스레 시비조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애프터서비스가 밀려 있어 다음 날 오후에나 올 수 있다고 한다. 한참을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며 투덜거렸다.

“어이구 이게 뭐야, 안 될 거면 처음부터 안 되든가, 중간에 멈추면 어쩌자는 거야”

대답 없는 세탁기에 역정을 쏟아낸다.
그날 저녁, 현관문을 들어서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재촉했다.

“세탁기 새로 사자.”
“왜?”
“왜는 왜야, 고장 났으니까 그러지.”
“어떻기에 그래?”

남편의 물음에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말투에 짜증이 섞였음을 알고 남편은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세탁기를 살핀다. 어린신부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안 된다 했잖아!”

억지 부리는 아이쯤으로 나를 여기는 것 같아 소리부터 내질렀다. 못마땅한 얼굴로 남편은 한마디 던진다.

“세탁기하고 너랑 똑같다. 십년을 함께 살더니 닮아 가냐? 시끄러워지고, 이젠 이곳저곳 고장 나고. 똑 너다.”

남편의 갑작스런 면박에 짐짓 놀라면서도 지기 싫어 못들은 척 싱크대로 향했다.
밤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됐는데….’ 오기도 나고 부아가 치밀어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남편의 말은 다만 외적인 모습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밑 빠진 독에 욕심을 채우듯 아이들과 남편 앞에 불평만 늘어놓았고, 불만이 쌓일수록 목소리는 높아만 갔었다.

갑갑한 내 속만 뚫어지면 그만이다 싶은 이기심에 찌꺼기를 거르지 못하는 세탁기처럼 가리지 않고 내뱉은 언사들이 가슴을 쳤다.

작은 일에 안달하여 좁은 속을 드러냈고, 자제력을 잃고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긴 내 모습이 어둠 속에 또렷하게 드러났다. 나는 한참을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나올 줄 몰랐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듯이….

다음 날 오후, 서비스센터에서 기사가 왔다. 거름망을 교체하고 고장 난 부품들을 수리했다. 덕지덕지 끼인 때까지 수세미로 밀고 나니 빛까지 발한다.
퇴근한 남편은 들어오자마자 광고전단지 한 장을 내민다.

“세일한단다. 세탁기 한 대 사러 가자!”
“됐거덩.”

순간 남편의 눈빛이 어리둥절해진다.

“세탁기가 나라며? 나 고장 났다고 버리고 새 마누라 얻는 꼴 죽어도 못 본다.”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남편의 손을 잡아끌었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각인하듯 힘주어 말한다.

“잘 들어요. 기사가 그랬어. 요즘 나오는 세탁기는 튼튼하지 못해서 이삼 년 쓰면 고장 나고 수리비용이 더 든다고. 옛날 세탁기가 확실히 튼튼하다더라. 게다가 우리 세탁기는 최고라서 앞으로도 한 십년 끄떡없겠다 하네.”

시원스레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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