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신문 초대석]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Q. 정유년 새해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 2017년 붉은 닭의 해를 맞았다. 올해는 거제시민들 모두 크게 희망이 이뤄지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대한민국이 굉장히 어렵고 거제시 경제도 어렵다. 거제시민 모두가 상당히 무거운 마음으로 생활해야 할 것 같다. 권위주의 등 과거 타성적인 정치문화에서 벗어나 소통하는 정치가 돼야 하고 헌법과 법이 잘 지켜지는 나라와 사회가 돼야 한다.

새해들어 북한이 위협적인 말로 공포를 조장하고 있어 단호한 준비와 각오로 안보를 지켜나가야 한다. 거제는 조선산업으로 세계적인 조선해양도시가 됐다.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힘든 상황이지만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조조정은 아프고 어렵지만 견딜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도 있다. 거제시민이 몇 년 간의 어려움을 참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 각국의 선박 연령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고 기후변화에 따른 친환경선박 요구도 커지고 있다. 기술력이 있는 대한민국 조선업이라면 능히 이를 해쳐나갈 수 있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큰 축인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은 정부에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Q. 정치인생을 논할 때 YS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김영삼 전 대통령만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그립고 존경심이 든다. 정치인생의 첫 출발이 초선 국회의원 김영삼의 비서관이었다. 그분의 정치철학, 국가와 고향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나라를 생각할 때 YS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또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해내고 뛰어넘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걱정하면 도리어 "이런 일은 허다하게 많이 올 수 있어.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만 해"라며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또 해내고야 말았다.

YS는 무슨 이야기든 일단 들어줬다. 사람이 밉다고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마음의 부담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흔쾌히 들어주다보니 적이 없어졌다.

드넓은 바다를 보며 자란 사람은 어떠한 일이 닥쳐도 포용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YS를 보며 자각했다. YS의 소통과 포용정신은 거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Q. YS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 김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전 언론사에서 그분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을 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부분이 많다. 사람은 현직에 있고 또 살아있을 때는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YS는 사심 없이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정치를 했다. 또 자신의 자산과 물려 받은 재산, 심지어 자신의 집까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말이 쉽지 대단한 것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사리사욕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는 극소수다.

철학자도 종교인도 아닌 YS는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다.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는 자기 삶의 사랑의 표시다.

Q. 거가대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고 들었다
= YS가 대통령 된 뒤 대우조선에서 열린 잠수함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거제를 방문했었다. 당시 생가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식사를 끝낸 뒤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미 7함대가 거제 인근 앞바다에서 훈련을 하는데 군함이 고장이 나면 멀리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 수리 조선소로 간다고 합니다. 거제에 큰 조선소가 두 곳이나 있는데도 말입니다. 부산이 세계적 항구도시로 발전한다는데 좁아서 되겠습니까. 부산사람들도 거제로 많이 놀러온다고 합니다. 이참에 거제와 부산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 7함대가 1년 내내 거제 앞바다에서 버티면 북한이 꼼짝을 못할 것입니다. 거제의 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YS가 "그래, 합시다"라고 해 거가대교 건설이 시작됐다. 거가대교 개통식도 부산 가덕도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당시 정무수석이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였던 정진석이었다. 원 정무수석과 만나서 "거가대교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답했다.

그래서 설명을 했다. 거가대교 개통은 거제시민들의 숙원사업인데 개통식을 부산에서 하면 되겠느냐고. 그래서 계획돼 있던 일정도 1주일 연기하고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해 거제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Q. 할 말은 하는 단호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 김홍조 옹은 잘 알려진 대로 멸치잡이 어장을 했다. 하지만 종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월급을 제때 주지 않을 때도 있었고, 급여 인상에도 인색했다.

YS가 신민당 원내총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명절이 돼 고향에 같이 내려와 한 방에서 세 명이 잠을 잤다. 자리에 누웠는데 홍조 옹이 대뜸 "김 비서, 내가 말이야 이제 거제에 자주 못 간다. 돈이 없어서 어장시설도 제대로 못해주고 해서 못 간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가 만년 대통령일 줄 압니까. 지금 국민들은 얼마 안 가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인심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바다 위에서 일을 하는 어민을 제대로 대해주지 못한다면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랬더니 YS는 만족한 듯 헛기침을 했고, 홍조 옹은 아무말도 못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유신을 반대하다 붙들려가 일주일 동안 구타를 당했다. 김영삼 정치자금에 대해 말하라면서. 당시 내가 이야기를 한다면 YS의 정치생명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를 한다거나 야당에 도움을 주면 무장 해제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한 뒤 "내가 잘못이 있다면 재판에 붙여라. 내가 죽더라도 이 비밀은 국민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크게 소리쳤다.

Q. 경남도지사 선거 출마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 1995년 YS를 독대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처음 시작하는 직선제 지방자치선거였다. 중앙정치를 하다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아랫길로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중앙정치를 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해 합의를 봤다.

하지만 정치인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이 돌아왔다. YS는 나를 중앙정치에서 밀어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참모들이 견제를 한 것 같다. 아쉬움이 있다. 당시 김혁규 경남도지사와의 에피소드도 있다. 신한국당 경남도당 위원장을 맡아 망년회를 했다. YS와 독대하기 전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 도지사가 옆으로 오더니 "의원님, 아니 형님. 내년에 도지사 선거에 나올 겁니까"하고 물었다. "왜?"라고 했더니 김 도지사가 "만약 나오지 않으실 거면 나를 만들어 주이소"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바로 "알았어"라고 말했다.

그 뒤 YS와 독대를 할 때 경남도지사로 김혁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YS가 바로 비서실장에게 말해 도지사 출마여부를 확인하게 한 뒤 나머지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Q. 지역 정치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다들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흠을 남긴 사람이 있다. 모두 자기관리가 부족한 탓이다. 공직에 오르면 내려올 때까지 첫 출발 때의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기 교만과 자기 과시가 나오면 반드시 좋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초심을 그대로 가져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거제의 자연환경을 보고 자란 사람은 성실하고 친절하며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Q. 김봉조에게 '거제'란
= 나의 전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어린 시절 밤바람이 불면 창호지를 붙인 창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마치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거제가 떠내려가는 구나'하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아침이 돼 바닷가에 나가 햇살이 푸르른 바다를 비치는 모습을 보면서야 '거제가 살았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늘 거제가 불안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가난한 거제를 개발해 잘 사는 고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실제 거제는 나라가 어려운 시절이면 크게 나라를 구한 곳이다. 한 없이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고 좋은 인물들이 태어난 곳. 거제는 대한민국 최고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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