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 김계수 거제시외식업지부 사무국장

강벼랑에 서 보라. 눈앞이 아찔하다. 지금까지 품어 온 모든 단어들이 벼랑 앞에 일시에 멈춘다. 뒤 따르던 바람과 향기, 무수한 생활의 상처들, 속으로 품었던 아름다운 시(詩)들, 얼키설키한 관계들이 순간 멈춘다.

벼랑은 죽음 앞에 미리 설 수 있는 기회다. 무서운 속도로 살아 온 자신을 멈춰 볼 수 있고 벼랑 뒤로 물러 서기 전 가져온 병 짙은 마음들을 미련 없이 폐기할 수 있어 좋다. 강벼랑 끝에 서서 주머니 속 동전과 갉아 먹혀진 생각들을 떨구어 보라. 한없이 가벼움을 느낄 수 있다. 억세게 나를 묶어 놓기 바빴던 재물과 욕심들이, 사는 동안 지독하게 괴롭혔던 살아 있는 사람들의 그 '한시 바쁨'이 버려짐으로써 순간 쓸모없게 된다. 비로소 속도를 멈추게 되고 가볍고 맑아진다.

모든 것은 속도가 있다. 빠르고 느림의 차이일 뿐, 모든 것들의 속도가 세상을 늙고 병들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타고 다니는 차가 속도 때문에 달리기를 그만두기도 하고 매번 바뀌는 계절과 나이도 누군가에게는 빠르기도 하고 또 더디게 오기도 한다. 일의 속도, 사랑의 속도, 세월의 속도, 관계의 속도…. 그래서 속도는 소멸로 이르는 벼랑이다.

어떤 것은 속도를 느낄 사이도 없이 소멸 지점에 이르고서야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말기 암 환자가 그렇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놓아야 하는 애달픔이 그렇다. 반대로 어서 갔으면 하는 것들은 더디게 우리 주변을 맴돌며 육체와 정신을 괴롭힌다. 마당에 핀 꽃들이 어서 피기를 바라다가 꽃 지기 전에 조금만 더 피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청소년들이 빨리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다가도 어른이 돼서는 역류의 극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속도는 저항이 일어나고 질투와 갈등, 결국에는 소멸에 이르게 돼서야 속도는 극약이고 벼랑에 이르게 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항된 속도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관계의 갈등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속도로 인해서 속도가 멈추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사는 곳곳에 너무 빠른 속도가 처참하게 망가지고 꼬꾸라져 있는 광경이 그렇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상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번잡하며 누적된 피로와 권태로운 세상일지라도 속도는 필요하다.

그래서 적절한 속도는 존재의 약진을 위해서나 생명의 유연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세상은 너무 빠르다. '하, 벌써 12월이다.' 이런 말 한 번 내뱉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는 것이 어려울 때 모두는 멈추고 싶어 한다.

그럼 강벼랑에 서 보자. 벼랑은 미련이 생기지 않아 좋다. 벼랑에 돌덩이 하나 던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 손에 잡혔을 때는 돌멩이였다가 떠나는 순간, 그것은 까마득한 소멸이 되고 떨어지는 공간만큼 내 마음은 가볍게 일어서게 된다.

돌 뿐이랴. 힘들고 부적절한 관계와 욕망에서 비롯된 모든 피로와 권태까지도 벼랑은 허락한다.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숱한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며 활기찬 사람조차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외롭고 고독하며 안정적인 치료가 요구되어지는 상태를 지녔다.

과다한 욕망으로 버리지 못해 발생된 내 인생의 속도는 다른 사람을 치지 않고는 나아가기 힘들다. 풍만해진 내 기운과 재산과 덕망이란 것도 다른 사람의 속도를 제치고 이룬 것이라 생각하자. 그래야 지금의 내 속도가 나를 멍들게 하는 무기는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강벼랑을 하나쯤 지니고 살자. 버림으로써 새 물건을 사 들일 수 있다. 마음속에 퇴적된 부적절한 욕망과 욕구를 쉽게 미련 없이 벼랑에 투척함으로써 가볍고 건강한 2017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마음의 강벼랑에 어지럽고 지저분한 과속의 세상들이 멈추기를, 강벼랑 끝에서 다시 천천히 다가오는 편안한 세상과 마주하기를, 편안한 관계들을 마중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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