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정치에 끼어들어 나라를 망친 중국의 3대 악녀라면 한나라의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를 든다. 물론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은 역사란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서 써지기 때문에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서태후(西太后)는 뛰어난 미모와 요염한 교태로 17세에 궁녀로 들어가 황제 함풍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되어 아들을 낳는다. 함풍제가 불과 서른 살로 죽자 6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동치황제(同治皇帝)로 앉히고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동치제가 정치적 자립을 시도하기 전에 죽게 되고, 겨우 세 살 된 광서제(光緖帝)를 황제 자리에 앉혀 놓고, 서태후는 정치의 실권을 쥐고 나라를 쥐락펴락한다. 황제가 열아홉 살이 될 때 서태후와 정치적 충돌을 가져오자, 광서제를 이화원에 십년동안 감금했다가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날 살해한다.

역사가들은 서태후를 한마디로 '사악한 찬탈자'로 규정하고 있다. 무서운 정권욕 때문에 제1황후였던 동태후(東太后)를 전병 속에 독약을 넣어 독살했고, 두 아들까지 희생시킨 비정한 어머니였다.

서태후는 사치스러운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의 한 끼 음식 메뉴는 128가지였고, 하루 음식값이 당시 농민 1만 명이 하루 먹을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옷이 3천 상자였고, 비취로 만든 밥그릇에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세계에서 제일 긴 복도로 기네스북에 오른 인공호수 이화원을 만들기 위해 중국 해군 1년 예산의 절반을 써버렸으니 청일전쟁이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화원 가운데 섬을 만들고 잘 생기고 건장한 미소년을 섬에 있는 낙수당으로 불러 하룻밤 즐기고 뒷탈을 막기 위해 죽이기까지 했다.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사치에 우선한 '탐욕스러운 통치자'였다는 또 하나의 닉네임이 그에게는 붙어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서태후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 "다시는 아녀자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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