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늘 사회현상에 둔감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한 쪽에선 "무슨 호들갑이냐?"며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잘 알다시피, 1784년 영국의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들면서 1차 산업혁명은 본격화됐다. 농경과 유목을 주로 했던 이전의 인류는 노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본인의 신체를 통해 직접 생산해내야 했다. 모름지기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이런 인간의 직접적 힘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힘의 한계를 감안하면 피라미드는 '불가사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차 산업 혁명이 인간에게 새로운 근육을 덧입혀 준 것이라고 본다면, 100여년 후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에 의해 촉발된 2차 산업혁명은 단순히 힘의 증가를 뛰어 넘어 혼자서 여러 개의 사물을 관장할 수 있는 대량생산의 기틀이 잡힌 시기다. 컨베이어시스템으로 상징되는 공산품시대의 본격적 도래는 자본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고 물질이 가져다준 만능적 쾌락과 정신적 황폐라는 명과 암 속에서 인간을 번민하게 했다.

3차 산업혁명은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본격화됐으니 불과 3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컴퓨터의 일상화는 공간과 시간의 활용을 이전과는 전혀 달리 사용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동일한 시간에 다수의 일을 할 수 있게 돼 예전에 한 달 걸리던 일이 지금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기도 한다.

네트워크의 활성화가 가져다주는 '홍길동 효과'도 대단하다. 축지법이나 분신술을 쓰지 않고도 음성이나 영상을 통해 전 세계 어디와도 동시 소통할 수 있으니 인간관계의 넓이는 거의 무한대급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을 굳이 도래한 것으로 보지 않는 시각은 바로 지금의 현실이 굳이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나눌 필요가 없을 만큼 혁명적 일상이라는 시각에 기초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초에 있었던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 의장에 의해 핵심 의제로 '4차 산업혁명의 이해 (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가 상정됐고, 이는 많은 공감을 얻어가며 인류에게 새로운 질서에 빨리 편입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달리 보면 기존의 시각과 사고, 경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혁명적 변화가 시작됐으니 멸종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적응하라는 경고와도 같이 들린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고 필요 이상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수준까지 와 있다. 오히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융합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고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관점에서 빅데이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결국 인간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예전처럼 유명한 디자이너가 패션산업을 주도하기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대중의 라이프 스타일을 분석한 빅데이터를 최대한 빨리 공정에 반영하고 시장에 내놓는 기업이 살아남는 시대다. 검증되지 않은 의사에게 생명을 맡기기보다 빅데이터가 축적되고 정밀한 수술이 가능한 대체 의료진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의료환경이 막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업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도 변해야 한다. 당연히 여기에 맞는 교육과정과 평가방식이 마련돼야 한다.

무엇보다 4차 산업혁명은 '문화혁명'이 돼야 한다. 인간보다 뛰어난 기술체를 여전히 능가하며 그것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요체는 인간 특유의 감성과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화는 이런 능력을 배가시키는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아울러 극도의 기술발전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유휴시간과 고도의 스트레스를 메워주고 줄여주는 최선의 처방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 가결의 과정에서, 오래 전 문명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졌던 직접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광화문에 모인 촛불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의사표현이지만 그 이면엔 고도의 정보기술과 그것을 감성으로 덧입힌 국민들의 위대한 문화적 역량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의 대열에서 많이 뒤쳐져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반전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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