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어제 저녁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슈베르티아데' 시리즈의 첫 공연인 '겨울나그네(Winterreise)'를 관람했다. 12월 초의 스산함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이 공연엔 최근 슈베르트 가곡 해석의 새 지평을 연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가 무대에 올랐다.

토마스 바우어는 현대 오페라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과거 슈베르트 가곡의 대가들이 들려줬던 표현방식과는 달리 훨씬 극적인 창법과 제스추어를 보여줬다. 그의 그런 표현방식은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시적표현을 훨씬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시종 가사를 맴돌며 감상할 수 있게 해줬다.

슈베르트 가곡에서는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흔히 우리가 즐겨 부르는 대부분의 가곡에서 피아노 반주는 노래 선율의 배경으로 부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반해 슈베르트 가곡에서의 피아노는 독립적인 음악으로서도 매우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가수와 피아니스트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와 선율을 직조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사실 겨울나그네와는 오래된 개인적 사연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고교입시를 마친 긴 겨울방학 동안 나는 또래의 여느 친구들처럼 당시 유행하던 팝음악을 늘 틀어놓고 살았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음악이 있으면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구입해 집중해서 듣곤 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면, 팝음악보다 클래식음악을 좀 더 즐겨 들었다는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당시엔 오페라 아리아 같은 것을 한국말로 번역해 한국 성악가가 부르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귀가 틔지 않아 그랬던지 그런 음악조차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음악을 즐겨 듣던 그해 겨울,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음악을 만나게 되는데, 노래가 끝난 후에 진행자가 소개해준 곡이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부른 겨울나그네 중 첫 곡 '밤인사(Gute Nacht)'였다. 나는 다음날 바로 레코드점을 찾았다.

"헤르만 프라이가 부른 겨울나그네 주세요"라는 나의 말에, 레코드가게 사장님은 "헤르만 프라이 보다 피셔 디스카우가 더 유명한데 그걸로 하지"라고 답했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헤르만 프라이 테이프를 구입해 왔다. 사실 두 성악가를 비교해 보지도 않았지만 헤르만 프라이의 겨울나그네는 그냥 첫사랑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한참 후에 어지간한 식견이 생기고 두 사람을 면밀히 비교해 봤지만 나는 여전히 헤르만 프라이가 더 좋다. 이건 합리나 논리 같은 이성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고 그냥 첫 입맞춤에 대한 기억을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기방어적 추억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 해 겨울, 나는 겨울나그네 24곡 전곡을 거의 다 외워 부르게 됐다. 그 땐 그것이 독일어인지도 몰랐다. 영어가 아닌것 같긴 한데 그 절도 있는 언어에 매료돼 숱하게 귀에 들리는 데로 받아쓰고 따라 부르길 얼마나 했던지 테이프는 이내 늘어져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다른 언어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불같이 사랑했던 노래가 겨울나그네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처음 배웠을 때 나는 내가 지금껏 불렀던 노래가 독일어 가사인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게 된 출발선이 그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제 나는 변심한 것일까. 적어도 옛날 사진 속 내 모습이 불현 듯 촌스러워 보이는 시점에 헤르만 프라이와 토마스 바우어가 오버랩되고 말았다. 적어도 어제 공연은 세상이 바뀌듯 노래도 다른 정서를 싣고 나의 마음에 바람이 들게 한 것이다.

주말 내내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채워질 슈베르티아데는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해질쯤엔 이미 공연은 종료됐겠지만 나는 또 얼마나 바람이 더 들지 모르겠다.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그의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모여 음악도 듣고 사교도 하던 모임을 일컫는다.

오늘날에 와서는 슈베르트 음악을 애호하는 동호회나 협회를 칭하기도 하지만, 32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성격조차 원만하지 않았던 슈베르트에게 슈베르티아데는 안식이고 활력일 수 있었을 것이다.

31살, 죽기 1년 전에 작곡된 '겨울나그네'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흑백의 색조로 시종한다. 하지만 이 위대한 걸작의 배후에는 절절히 외로운 한 음악가를 위무하는 슈베르티아데!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외로움이 뼈 속으로 스며드는 계절이다. 세상도 외로움을 독려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러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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