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정경'이란 과목이 있었다. 이 칼럼이 문화를 다루는 난이다 보니 혹시 슈만의 '어린이 정경' 같은 걸 떠올리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수업은 그렇게 정겨운 과목이 아니었다. 그냥 정치와 경제를 합쳐서 부른 것이니 일종의 사회수업이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시간에 배운 몇 가지 정의들이 있었는데 '정당의 목적은 정권창출'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이라고 배웠다. 그 시대를 거친 나 같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의 기성세대로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게이트의 대다수 주·조연들이 바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똑똑해서 대학 갈 때 마을 어디쯤 플래카드 한둘 쯤은 내걸렸을 법한 수재들이다.

어찌 정당과 기업의 목적을 이처럼 간결하게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학력고사 세대들에게 토론 없는 주입식교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한 학급에 60명이 넘는 학생을 상대로는 이렇게 정리해주고 외우게 하고 평가 하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30년이 훨씬 넘은 이 정의를 아직도 외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교육적 성과는 일정부분 거양되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경직된 시각으로 지금껏 기업과 정당을 바라보고 투표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기업을 운영하거나 선출직에 출마 했을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당시 교육환경이나 방식이 다시금 아쉽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가장 강조되었던 단어가 창조였다. 창조는 창의와 유의어로 문화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의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인들을 정권의 코드에 따라 분류하고 급기야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줄서기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방송프로그램에도 일일이 개입해서 제작진의 성향을 분석하고 대본을 실질적으로 사전 검열했다는 정황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독재 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다. 우리는 그 사이 많은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세울 땐 이제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박수를 보내어 주었었다.

창조는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전국 18개 지자체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만들어 놓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하던 대통령은 밀실에선 전혀 새롭지 않은 방법들, 아버지 박정희 시절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구닥다리 수법들을 총동원해 기업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짓밟았던 것이다. 물론 현재 검찰 공소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기업을 피해자로 보는 인식에 동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CJ의 경우처럼 대기업 자본이 문화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소비자들의 건강한 인식과 참여로 인해 유지되던 작품성의 마지노선이 기업의 약점을 손에 쥔 정권의 비뚤어지진 개입으로 하루아침에 박살을 내 놓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도 창조와 창의의 이름으로 행해졌으니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당장 12월 초 코엑스에서 개최될 '창조경제박람회'가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이다. 창조경제와 관련된 예산들은 중앙정보와 지방정부 할 것 없이 칼바람을 맞고 있다. 암만 봐도 창조경제를 다시 부양할 수 있는 묘책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언제부턴가 기업활동과 관련해 '사회적 기업'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취약계층에게 사회적 서비스와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회적 기업도 공모사업을 통해 일정부분 지원을 받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지원이 전제되다 보니 잘못 이해한 운영자들로 인해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기업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창의에 있다. 아이디어의 집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업하기도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

사회적 기업은 영리와 비영리의 중간지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또 취업대란의 시대에 청년들에게 열린 작은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정경시간에 배운 정의 하나가 우리를 이렇게 정당하고 합리적인 부조리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만든 부작용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적 기업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사회적 문제해결'이라는 정의가 존재한다. 동의가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전반에 관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할 시점에 있다. 기업조차도 그것이 목적이 돼야 하는 세상이다. 적어도 이윤 외에 목적 하나 추가 정도는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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