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오래 전이다.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학교였다. 3학년 때니 내가 어릴 때다. 여름방학인데다 광복절이라 온 식구가 늦은 아침상을 놓고 둘러앉았다. 요즘 같으면 브런치인 셈이다.

흑백TV가 한 대 있었는데 일본제 도시바였다. 브라운관 앞을 자바라 같은 것으로 여닫을 수 있게 해서 마치 작은 극장을 연상시키는 텔레비전이었다. 채널이라곤 KBS, MBC, TBC 세 개가 전부였다. 선택의 폭이 매우 좁았고 아버지가 혹시 일찍 들어오시는 날엔 그마저도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독점되는 구조였다.

낮방송이나 심야방송이 없을 때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5시부터 시작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정시 방송 전에 화면조정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무지개 색깔로 돼 있던 세로줄이 화면조정 그림인데 그것만 바라보고 방송시작을 기다리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농담 한 마디 하자면, 그래서 난 지금도 무지개떡을 싫어한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낮방송이 열리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지는 편이다.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을 때라 주말은 텔레비전 보는 재미로 늘 기다려졌다.

그래서 그날 광복절도 기대가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오전엔 국경일이라 방송 3사가 모두 기념식을 중계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참 이해하기 힘들다.

광복절 기념식이 어린 애에게 뭐가 그리 재미있었겠는가. 밥상을 두고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은 텔레비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빨리 끝나기만 바라고 있었다. 박정희대통령이 뭐라고 축사를 하고 있는데 땅~ 땅땅 하는 총성이 울렸다. 상식적이지 않은 소리에 우리는 모두 숟가락을 놓고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이게 무슨 일이냐?"를 반복하시고 있었고 텔레비전은 궁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정지화면으로 전환되며 한 동안 먹통이 돼버렸다.

안 봤으면 모를까. 그날 그 영상은 나한테도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하물며 그로인해 어미를 잃은 자식들은 오죽할까. 박정희는 말이 대통령이지 거의 왕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의 민도가 그랬다.

왕정을 끝낸 지 반세기도 안 됐을 때다. 사가에도 종살이를 하거나 식모 생활을 하며 정상적인 임금 대신 노역의 대가로 숙식 정도만 해결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신분이나 계급이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했던 시기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처한 작금의 위기는 어쩌면 1974년 광복절 기념식으로 거슬러 가는 게 아닐까.

IT강국이라고 하면서 선출직 대통령 선거에서는 철저하게 과거의 프레임 속에 갇힌 채 왕국의 부활을 꿈꾼 건 아닐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내놓은 인선들을 보면 사위를 비롯한 친인척의 약진이 눈에 띈다. 우리 같으면 난리가 날 일들이 미국에서는 오히려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기에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결과를 두고 입을 뗄 일은 전혀 아니다. 낙선했지만 힐러리는 심지어 전 대통령 클린턴의 아내이지 않은가. 우리 같으면 "저그끼리 다 해 묵는다"고 난리가 날 일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의 배경은 겉으론 미래를 지향하면서 속으론 과거의 특정한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미성숙에서 기인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이 그렇다. 그녀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녀의 옆에 있는 사사로운 가신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국무위원을 비롯한 모든 공적 시스템 속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 변명거리가 전혀 없지는 않다. 왕정과 식민을 거쳐 고도성장기의 폭압적 인권말살기와 제법 번듯해 보이는 껍데기를 가진 지금까지 내달려오는데 고작 1세기가 채 걸리지 않은 탓이다.

정체성의 전환이 쉽지 않았던 시절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며 눈치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줄 우리가 제일 잘 안다. 그래서 묶어줄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고 교육은 그 동안 단일대오를 위한 세상에 없는 많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내었다.

문제는 어른이 돼서도 이 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맹신이 타인을 부정하고 위협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대통령도 우리도 이제 이 틀에서 헤어 나와야 할 때이다.

맘은 아프지만 이렇게 완전히 망가져 봐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이번 국가농단 사태가 국가시스템이나 우리 자신을 리셋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라디오에서 배철수가 팝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요즘 팝송인 모양이다. 듣기 좋다. 내가 아는 팝송만 팝송인 줄 알았다. 내가 즐겨 듣던 시기의 팝송만. 마치 그 이후엔 팝송이 사라진 것처럼. '아! 옛날이여'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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