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리 / 계룡수필 회원

“엊저녁에 보름달 보았니? 참, 밝더구나.”

요즘 들어 어머니는 전화를 자주 하신다. 지난밤 창문에 걸려 있는 둥근 달을 보고 세월속에 덮어 놓았던 옛 기억을 회상하신 것 같다. 가슴에 고이 담아 놓았던 그리움이 초가을 소슬 바람과 함께 깨어나고, 애써 묻어둔 회한들이 달빛과 함께 되살아나는가 보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나는 어머니의 애간장을 끓게 하는 아이였다. 달빛으로 몸짓, 손짓을 이리저리 만들며 땅에 비친 흑백영화에 심취해 있곤 하였다.

때로는 장롱 속에 정갈하게 손질하여 걸어 놓으신 어머니의 옥양목 치마를 몰래 꺼내 입어 보기도 했다. 아무리 올려 입어도 길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어깨까지 올려 입고 마법에 걸린 듯 달빛 아래서 춤을 추기도 했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치마폭을 손으로 더욱 넓게 퍼트리며 빙글빙글 돌다보면 어느새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예쁜 공주가 되어 있었다.

달빛으로 환한 밤이 되면, 어머니가 집으로 얼른 오라는 재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안에서 끓어 나오는 신명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달밤은 낮처럼 밝아서 좋았다. 여느 밤이라면 그저 마당에 나가는 것마저 머리끝이 주뼛주뼛 섰겠지만 보름달이 덩실 떠오른 밤이면 왠지 보름달처럼 인자하게 생긴 마음씨 넉넉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지켜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곤 하였다.

친구들과 평상에 누워 보름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두 귀 쫑긋한 토끼가 절구로 방아 찧고 있으리라고 한 편의 이야기를 짓다보면 어린 마음에 그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딸의 속내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마주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달빛에 얽힌 이야기들을 속삭이듯 들려주셨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 잡히지 않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슴이 꿈틀대는 꿈을 키웠다.

어릴 때는 하염없이 보름달을 바라보며 이렇듯 동화 같은 일들을 경험하고 기대하였는데, 요즘에 바라본 보름달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보름달이 하얀 배처럼 떠 있으면 그 배를 타고 여러 얼굴을 만나러 간다. 거기에는 거동이 불편하여 병원에 계신 아버지도 계시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어머니도 그 속에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주변을 변하게 만든다. 아직도 저 달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빛을 발하는데, 사람은 젊음이 반짝 빛나듯 쉬 사그라진다. 몇 해 전만 해도 힘이나 걸음으로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던 분들이셨다.

부모님께서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오남매를 키우셨다. 달빛을 받으며 일하실 때도 종종 있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농번기에는 형이 동생들을 업어주며 돌보았고 동생들은 형의 말에 순종하였다.

오순도순 밥상에 둘러 앉아 맛좋은 찬이 있으면 권하기도 하는 우애 좋은 남매였다. 사탕 한 개, 사과 하나라도 골고루 나누었다. 어렸을 때는 나보다 형제들이 더 잘 먹고 건강하길 바랐다.

해를 거듭하면서 형제들은 전과 달라졌다. 서로를 염려하던 마음들이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마치 어떤 숫자에 집착하는 듯 보였다. 흙 먹기 놀이에 정신을 쏟았다. 한 뼘이라도 더 많이, 더 길게 줄을 긋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응원자들도 뒤에서는 작전을 모색했고, 앞에서는 궁색한 얼굴을 내밀었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자로 잰 듯 선을 그었다. 서열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부모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일이다. 재물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요즘 들어 옥상에 올라 달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내 생활이 무기력했던 날은 돗자리를 펴고 누워본다. 무방비한 상태로 수줍은 듯 달빛을 비추는 보름달을 받는다.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슬이 나뭇잎에 매달려 빛을 발할 쯤에도 처음 그대로다.

가슴이 아려온다. 세상의 파도가 세차게 밀려와도 나를 비켜가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마음이 할퀴어져 생채기가 쓰릴 때, 비구름을 머금은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달은 내게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가끔은 책망을 하고 교훈도 아끼지 않는다. 저 달은 내게 어둔 하늘에서 의연하게 빛을 발하는 자신처럼 살라며 조용히 속삭였다. 별자리 위로 보름달은 흰 빛을 발하며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여름 어머니는 우리 집에 다니러 와서 한 달포쯤 계셨다. 조금만 움직여도 찬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잡고 다리를 끌며 걸으신다. 앉았다 일어설 때에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 하셨다. 그래도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그 당시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정적 속에 바라본 달을 떠올려본다.

소슬한 초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한가위가 다가왔다. 달떡이라 부르는 보름달 송편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고 싶다. 오늘도 주무시지 않고 달빛을 보시며 옛날을 회상하시는 어머니. 저 달처럼 몸도 마음도 밝고 건강하시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창문에 걸린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고개를 내민다. 저 달 속에 쇠잔해진 어머니의 얼굴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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