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미국 포크 록의 전설 밥 딜런(Bob Dylan)을 선정했다.

노벨상의 각 부문별 수상자가 발표되면 의례히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번 밥 딜런의 수상은 그 반응이 각별히 더 뜨겁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가장 파격적인 선정이라는 반응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현실참여적인 곡들을 많이 발표해 저항가수로도 알려져 있는 밥 딜런은 화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성과로 인정되는 노벨상에 걸맞지 않게 왠지 포커스가 흐려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혹평을 내 놓는 사람들은 노벨상이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옹호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음유시인'이라는 수식어로 방어를 대신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래는 시와 선율의 만남이다. 다시 말해 문학과 음악의 결합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 부르는 사람의 음색이나 감정이 얹어져 감성의 영역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서사시들이 극적인 요소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악과 연극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공연의 형태로 진행했던 것을 빗대어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은 봉건제후의 궁정을 방문해 자작시를 낭송하던 시인을 일컫는다. 그들의 작품소재는 여성에 대한 연모에서부터 전쟁과 종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면서 활동반경을 넓혀 나갔다.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서정시는 근세 유럽의 시의 원조가 됐다.

이런 의미에서 음유시인은 멜로디보다 메시지가 강한 문학적 예술가로 인정돼졌던 것이다.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음유시인들의 활약상은 새로운 시 경향이라는 트렌드로 북프랑스로 옮겨가서 이른바 '트루베르(trouvere)'라고 일컬어지는 음유시인들을 낳게 했으며, 그 바람은 더 부상해 독일식 음유시인인 '미네젱거(Minnesinger)'를 탄생시켰다.

또한 남방의 이탈리아에서는 베르디 오페라 제목에도 등장하는 '트로바토레(trovatore)'라는 음유시인들이 활발한 활약을 했다. 이들 음유시인의 활약은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나라까지 망라해서 근대 서정시의 발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밥 딜런을 음유시인의 계승자로, 노벨상을 그 징표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올해 미국 예술분야의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문예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밥 딜런이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이미 밥 딜런에 대한 진지한 조명과 평가가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

예술행위가 순수해야 한다든지 현실참여가 불가피하다든지 하는 진부한 논쟁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역사 속 예술행위는 시대에 따라 계몽적 성격을 동반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술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좌절과 기대가 모여 그렇게 해석되고 불리어지는 경우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 역시 시대정신을 완전하게 벗어난 상태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고전주의 음악에서 낭만주의 음악으로 음악사조의 물꼬를 틀어놓았고 오늘날에 와선 베토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계몽적 기능이 극대화돼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술가의 생산자적 기능과 소비자적 기능은 예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노벨 문학상에서만큼은 수상에 대한 기대를 여러 차례 가졌던 적이 있다. 소설가 박경리와 시인 고은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엄밀히 보면 우리의 경우에도 박경리의 생명사상가로서의 면모나 고은의 현실참여적 시각에 기대한 측면이 많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1953년 '2차 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당시에도 논쟁거리였지만 이번 밥 딜런처럼 파격적인 사례가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같이 다뤄질 것이다. 어쩌면 이런 판단의 기조에 깔려있는 시대의 반영이 상이 가지는 기능이자 묘미이다.

상은 불필요한 권위로부터 탈피해야만 제대로 된 권위를 가질 수 있다. 어쩌면 만화에 대한 경시, 줄글에 대한 막연한 존중 같은 것이 우리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불필요한 권위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영역에서도 언젠가 노벨문학상이 나올 거라는 기대와 예측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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