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지 수필가

▲ 황광지 수필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다.

수도원의 어두움이 깃든 복도를 걸어 막다른 방으로 들어갔을 때 유리관 속에 누운 노 수사님의 시신이 있었다. 아흔 여섯 해를 마감하고, 전날 선종하셨다는 노 수사님은 고요히 잠든 듯했다.

이승의 거품은 모두 빠지고 요르단 강을 건너기에 가뿐한 몸만 남긴 채 다가올 천국을 꿈꾸는 듯 누워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잠깐의 묵념만으로 예를 표하는 것이 부족한 것 같아 정성들여 성가 한 곡을 불렀다.

"오늘 이 세상 떠난 이 영혼 보소서~."

성가를 부르는 사이 부친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우 두 사람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하느님 품으로 떠나게 된 수사님의 선종을 기꺼움으로 대하던 나는 문우들의 붉은 눈시울을 보면서 '자기 서러움에 북받쳐 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도 내 곁에 있던 사람을 잃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의 부고를 받고 영안실을 찾을 때면 내 서러움에 북받쳐서 눈물을 쏟아내던 경험을 많이 했다.

남의 초상에 가서 그 영혼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아픔을 두고 울었다. 영안실의 정서는 이러나저러나 슬픔이 묻어나는 것이며, 어느 쪽이라도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눈물을 흘리던 두 문우는 하나같이 노 수사님의 모습이 자기 부친을 꼭 닮았다고 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얻었던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날 때는 그런 순정의 모습이 되는가 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수도원을 방문하는 날, 수사님의 장례를 치르는 예절을 보게 됐으니 바깥사람으로서는 호기심이 모아지는 일이었다. 바깥세상과는 달리 수도원에서는 염하기 전까지 유리관 속에 시신을 모셔놓고 마지막 접견을 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어쩌면 생전에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여느 영안실과는 달리 떠들썩하기 커녕 고요해서 더 경건한 빈소에서 죽은 사람을 편안하게도 진지하게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유리관 속에 누운 노 수사님의 모습에서는 하느님께 봉헌한 한생의 임무를 무사히 다 끝내고 난 홀가분함이 서려 있었다. 빈소에서 물러나 수도원의 다른 곳을 봐도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선종한 노 수사님을 접견해서인지 그 얼굴에서 느껴지던 분위기가 둘러보았던 수도원 곳곳에서 스며들어 가만가만 쌓이는 듯했다. 역사관에서 봤던 흑백사진 속에서도 그랬고,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는 초기의 성당건물에서 풍기는 것도 그랬다.

낮 11시40분, 성당에서 드리는 수사님들의 기도를 지켜볼 때도 고요와 내려놓음이 마음에 다가왔다. 성당의 오른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대단한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이지만 그것마저 조촐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이 바로 구도자의 향기인가 보다고 느꼈다.

우리들을 안내한 수사님은 신자가 아닌 일행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수도원에 대해 몇 가지를 설명했다. 각 수사님들이 맡은 일들은 작은 일이라 하여 '소임'이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소임'을 맡은 그 분들이 크게만 보였다. 수도자의 기도 힘이 어지러운 세상에 실뿌리처럼 파고들어 퍼져나가 그런대로 세상도 지탱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침묵이 구석구석 밴 베네딕도 수도원과 영원한 침묵으로 구도자의 길을 완성한 노 수사님의 모습을 만나면서 내 삶을 한 번 가다듬는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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