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등면과 거제면에서 태어난 화가와 작곡가로 수많은 작품활동 펼쳐
소·목동 등 조선민중의 삶을 자기의 살처럼 표현한 진정한 민중작가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식민지 시대 희망과 애환을 담아내

근·현대 화가 1세대 가운데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여산(黎山) 양달석(1908~1984)을 빼놓을 수 없다. 1908년 10월18일 사등면 성내리 성내마을에서 태어난 양달석은 2남1녀 중 장남이었다.

두 살 무렵 어머니를,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집에서 소먹이는 심부름을 하던 양달석은 1924년 통영청년단의 협성학원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통영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림에 대한 양달석의 소질은 당시부터 빛났다. 1925년 경북 금름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김천소년소녀문예전람회 제1부 도화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진주공립농업학교 재학 당시에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한 전 일본 중등학생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양달석은 도쿄 데이고쿠 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수학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정식 입학생이 아닌 청강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결과다. 데이고쿠 미술학교에서 1년 정도 공부하다 건강과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귀국했다는 것이다.

양달석의 첫 데뷔는 1932년 5월에 이뤄졌다. 제11회 조선미술 전람회에서 양달석은 '전원의 사랑(원제 田園의 愛)'으로 서양화 부문에 입선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양달석에게 돌아온 것은 미술계의 가혹한 평가였다. 미술계의 혹평에도 양달석은 붓을 놓지 않았다. 이후 1938년과 1939년 제17·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가두예원'과 '풍년제'로 연이어 입선하는 성과를 낸다.

양달석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사등면 서기로 재직했다. 당시 박봉에도 그림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던 것은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의 잇따른 성과에도 양달석은 독자적인 그림을 찾기 위해 모험을 시도한다.

사등면 서기를 퇴직한 그는 1939년 10월 현해탄을 다시 건넌다. 약 10개월 동안 도쿄공업기술학교에서 제도과 수업을 받은 양달석은 시타야구 니시마치 이노우에 연구소에서 제도사로 근무하며 홀로 서양화 연구를 이어갔다.

그의 노력은 1941년 빛을 발하게 된다. 같은해 3월5일부터 25일까지 도쿄미술관에서 열린 제11회 독립미술협회전람회에서 '고향'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때부터 양달석이라는 이름이 중앙화단에 알려지게 된다.

해방 이후 양달석은 조선미술가동맹 부산미술동맹 위원장과 3·1기념행사 경상남도준비위원 등을 역임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산지부 소속이었던 그는 1947년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당시 양달석은 경남미술연구회에 전혁림·우신출 등과 함께 참여하던 시기였다.

한국전쟁 당시 양달석은 해군종군화가로 나선다. 군복을 입은 채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빈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화가단은 육·해·공군으로 나줘져 있었다. 해군종군화가단은 1951년 3월 해군본부 정훈감실 산하에 설치됐다. 종군기가단과 작가단 등과 함께 활동한 것이다.

전쟁 이후 양달석은 부인과 함께 원불교 사상에 귀의해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60~1970년대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간 양달석은 '서양화가지만 소재가 동양화에 밀접하고, 소와 목동 등 조선민중의 삶을 자기의 살처럼 표현한 진정한 민중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만강은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민족의 피눈물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오/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

구성진 노랫말의 '눈물 젖은 두만강'은 지금도 널리 불려지는 국민 애창곡이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희망과 애환을 담은 '눈물 젖은 두만강'은 가수 김정구의 대표곡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작곡가 이시우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작곡가 이시우(1913~1975·본명 이만두)는 1913년 거제면 남동리 45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거제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시우는 당시 학적부에 '유년시절부터 창가에 소질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경남 창원군 국산리 부근으로 이사한 그는 만주 하얼빈상업학교와 만주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에서 법률을 전공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만주로 돌아온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얼빈지국과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에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엘리트코스를 밟고 일본 유학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지국장까지 지낸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눈물 젖은 두만강'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북한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는 2005년 5월호에 '눈물 젖은 두만강'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천리마' 보도내용에 따르면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30년대 중엽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 중이던 극단 '예원좌'의 작곡가 이시우가 길림성 토문시의 한 여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1935년 어느 날 이시우가 여관 뒷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 두 그루를 보며 고향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관집 주인이 "그 나무는 내가 두만강을 건너올 때 고향에서 떠가지고 와 1919년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시우는 '추억'을 주제로 곡을 구상하며 밤을 지샜다.

그런데 옆방에서 비통하고 처절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독립군 활동을 하던 그 여인의 남편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총살 당했고, 그날이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두만강 가에 나간 이시우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사연을 이야기 해주자 그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이시우가 곡을 붙였다는 이야기다. '천리마'는 이 노래가 한명천 원작·김용호 개작·이시우 작곡이 정확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38년 박시춘 편곡·김정구 노래로 녹음돼 오케(OK)음반으로 발매됐다. 광복 이전 만주에서 작곡한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렇게 이시우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됐다.

8·15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는 다시 연예계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1948년 지리산 전투지구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해 선무공작대원으로 활약한 그는 경찰에 투신해 오랫동안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1962년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이시우는 '님없는 거제도' '인생 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등을 발표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64년 KBS라디오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주제음악으로 쓰이며 국민가요로 각광받게 된다. 이시우는 1975년 1월 첫눈이 내리는 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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