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15년 전 쯤이다. MBC와 함께 야외음악회를 기획하던 중 가수 조영남을 처음 만났다. 행사 규모가 상당히 크고 실험적이기까지 해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연배도 훨씬 더해서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일에 임하는 자세도 매우 열정적이라 그 공연에 참여했던 많은 출연진들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편한 자리에서 식사라도 하게 되면 자유분방한 그의 언변과 사고방식에 적잖이 놀라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행사 이후 한 동안 격조했는데 어느 날 '독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르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그래선지 방송 대신 지방 나들이가 잦아졌다. 전시회를 한다고 초청장도 오곤 했다.

하루는 작심을 하고 그림도 보고 안부도 물을 겸해서 전시장을 찾았다. 화가와 가수를 합쳐 자신을 화수(畵手)로 불러주길 원했던 그의 작품은 사실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림을 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흔히 하는 방식으로 자그마한 화분 하나와 축하의 의미로 소정의 마음을 담은 봉투를 건넸다. 그는 답례로 그의 저서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자에 "두루 두루 인사를 담아"라고 쓰곤 자필 사인을 해 나에게 줬다. 집에 돌아와 책을 보니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재미삼아 볼 만한 개론서였다.

잠시 작업을 같이해 본 정도의 인연이지만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나 입담은 생활과 방송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비단 조영남씨의 대작 사건뿐만 아니라 최근 불거진 이우환 화백의 위작사태를 보면 미술계의 '진짜와 가짜' 논란은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미제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앞으로도 개선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일단 이 시장은 매우 폐쇄적이다. 일반인들이 시장의 구조에서 별로 할 역할이 없다. 조영남씨 같은 경우는 원래 가수로서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시장 진입이 수월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일단 시장에 자신의 작품과 이름을 알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이른바 화상(畵商)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거의 노예계약에 가까운 불공정 계약이 이뤄진다. 작가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성공한 작가라 하더라도 무명의 시기가 있고 또 오랜시간 동안 작업을 하다 보면 특정한 시기의 작품들이 각광을 받거나 또는 외면 받는 현상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심지어 작가 자신이 '전성기 시대의 위작'이라는 유혹으로 스스로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품 위작은 매우 매력적인 돈벌이 수단이다. 이것은 작가나 화상 모두에게 해당된다. 욕망이라는 코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수억에서 심지어 수천억의 돈을 만질 수 있는데 그 유혹이 오죽하겠는가.

예술 분야 중에서도 음악이나 무용 같은 경우는 모방은 가능하지만 위작처럼 대체자 행세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술작품은 일단 기술적으로 상당 부분 가능하다. 이번 이우환 위작 사태도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비교적 단순해 모방하기가 쉬운 반면 그림값이 매우 높아 위작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의 위작 역사는 미술계의 교육관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위작은 모사에서 비롯되는데 예전의 선생님들은 대개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을 중요한 과정으로 삼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모작을 국전에 출품하기도 했는데 도덕적으로 문제시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상까지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다. 하지만 여기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스승이 죽고 난 후 이런 모작들은 위작자들의 솜씨에 의해 스승의 작품으로 둔갑하고 만다.

간혹 자기 작품을 몰라보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의 거장 카렐 아펠은 경매에 출품된 자신의 위작을 진작이라고 확인해줬는데 결국 가짜임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다. 거꾸로 19세기의 거장 코로는 위작임을 알면서도 여러 작품에 자기 사인을 해줘 지금껏 미술사가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피카소도 자신의 진짜 작품을 들고 온 컬렉터에게 진작 확인을 해주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의 작가 키리코는 작품에 왜 연도를 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건 다 비평가나 장사꾼들의 집착이 만들어낸 거지. 무슨 우표수집도 아니고, 날짜가 왜 중요해. 작품은 작품성으로 구분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도 오래 전 내가 적어 놓은 메모장 글씨가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눈이 아닌 마음에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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