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몇 해 전, 모 대학의 홍보영상 제작업체 선정심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10여 팀이 넘는 업체가 경합을 벌였는데, 사실 나는 딱히 영상이나 스토리텔링 쪽 전문가도 아니어서 다른 심사위원들 얘기를 경청하며 합리적인 의견에 힘을 보태는 정도의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해 그 대학에서는 미스코리아 진을 배출했던 모양이다. 업체마다 앞 다투어 그 여학생을 중심에 두고 구성안을 짜 왔다. 당연히 대다수의 심사위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한 질문과 조언을 위주로 의견을 개진해 나갔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문제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홍보영상의 길이였다. 10분 분량으로 과업지시가 나갔단다. 요즘 인터넷 서핑을 해보면 별별 희귀하고 재미있는 영상이 많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네티즌의 선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 혹시 간택이 되더라도 오랜 시간 머물지 않는다. 15초 광고 시간도 지루해 하며 제발 광고 좀 치워달라는 댓글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나는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시리즈로 10편 만들자고 제안했다. 따로 랜덤으로 돌리고 학교행사 같은 곳에서는 합해서 보여주면 좋겠다고 했다. 선정업체가 내 의견을 반영했는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시대의 반영이라 생각했다. 요즘 새로 만들어진 조어 중에 '스낵 컬처'라는 용어가 있다. 말 그대로 스낵처럼 간단한 문화 활동을 일컫는다.

스낵컬처는 미국의 IT잡지 와이어드(Wired)가 2007년 처음 사용했다. 패션계의 SPA브랜드들이 기획부터 제작, 유통 등을 다 맡아 하다 보니 새로운 상품들의 회전율이 엄청 빠르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하철이나 병원 같은 공간에서 점심때처럼 자투리 시간에 하는 작은 음악회나 공연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속에서 간식처럼 가볍게 즐기는 일련의 문화행위를 총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한 셈이다.

스낵컬처 때문에 풍속도 또한 많이 바뀌었다. 웹툰이나 웹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기업이나 기관에서는 이 콘텐츠를 활용한 홍보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노골적인 상품 선전보다 짧은 웹드라마를 이용해 재미를 주고 그 속에서 기업 홍보를 은연 중 구사하는 방식이다.

모 떡복이 체인점이 만든 '매콤한 인생' 같은 웹드라마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짧고 강렬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세태를 반영하듯이 이제는 10분 분량의 영화는 옛 이야기가 되어 간다. 심지어 '29초 영화제'라는 영화제도 개최된다.

이러다 보니 인재상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진득하게 오래 앉아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 우등생이 되고 모범이 됐다면 지금은 순발력 있고 소통에 능해야 인재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기업에서 촌철살인의 직관과 전광석화와 같은 두뇌회전 그리고 깊이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인재들을 뽑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스낵컬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다이제스트 능력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요점만 잘 추려 전달하는 능력은 공급자나 수요자 모두에게 핵심적인 가치다. 포털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드 뉴스' 도 이런 문화의 반영이다. SNS 상에서도 글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 조사가 사라지더니 요즘엔 아예 주어도 없다.

한편, 지루한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쯤으로 생각하는 신인류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최근 앞뒤 없이 자기 말만 하는 새누리당 이정현의원의 통화내용을 들어 보니 명색이 국가 지도자 반열에 있는 양반이 사용하는 언어가 듣고 있기 민망할 정도로 가볍다.

또 국방부에서 사드 배치와 관련한 발표를 하는데 이게 바로 스낵컬처의 폐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비가 될 것 같아 짧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솜털처럼 가벼운 발표였다.

미국 측 인사의 "우리 같이 갑시다"라는 마지막 한국어 인사말은 코믹하기 까지 했다. 위의 사례들은 1차적으로 자기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기인했겠지만 스낵컬처의 공간에 사는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부작용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스낵컬처로 대변되는 문화현상을 우리는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고 스낵컬처의 순기능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캐주얼한 편안함을 잘 누리기 위해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간식과 주식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선 정장도 입을 줄 알아야 캐주얼도 멋있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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