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신문과 함께 한 금강산문화기행

“통일향한 몸부림에 말뚝도 휘었다.
  그곳엔 그리움도 민족의 한도 함께 있었다”
금강산 1만2천봉,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속초서 온정각까지 68㎞

속초에서 온정각까지 이렇게 가까운 것을, 그런데 왜 이처럼 더디었는가.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던 한민족의 땅 북한, 그 곳엔 아직도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그리운 이름도, 풀어헤친 가슴도, 더구나 반겨줄 그 누구도 없었다. 다만 아름다운 금강산, 낭만어린 삼일포, 파도만이 출렁이는 해금강, 그 어느 곳에서도 번뜩이는 눈빛이 미울 뿐이다.

지난 10월30일부터 11월1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펼쳐진 금강산 기행은 거제신문과 세계항공여행 거제지사가 공동 주관했다.

거제신문 직원 10명과 신현읍 주부대학 회원 및 효도관광 회원 21명 등 총 31명으로 구성된 이번 금강산 기행단은 안순덕 할머니(83·사등면 언양리), ‘63년 만의 고향땅 방문’을 주선해 더 큰 의미를 남겼다.

10월의 마지막 날 비무장지대 휴전선을 지나 북한 땅으로 들어서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국수속을 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검색대 담당 40대의 여자 군인이 일행 한 사람의 카메라를 압수했다. 렌즈 ㎜표시가 지워졌다는 것이 이유다. 160㎜ 까지만 허용되는 이곳 실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고배율 카메라를 가져오기 위해 표기 문자를 지웠다는 것이다.

실제는 95㎜에 불과했던 그 카메라는 “다년간 카메라를 봐 왔기 때문에 내가 더 잘 안다”는 그 여군의 말 한 마디에 그만 딱 걸려야 했다.(결국 돌아오는 날, 10달러 벌금으로 되찾았다)
번호판을 가린 버스 기사가 우리의 승차를 명령했다. 남한에서 쓰는 모든 것은 사용하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번호판을 가린 이유란다.

금강산 여행을 총괄하는 현대 아산측의 조장(가이드)은 “고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16일과 10월27일, 각각 소떼 5백마리와 5백1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면서 금강산 관광의 물꼬를 터 그해 11월18일 관광의 역사는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끝까지 지켜야 할 우리의 길

북한으로 향하는 길은 낯설지 않다. 이곳에 한민족의 유전자가 배였음인가.

차디찬 철책을 뒤로하고 비무장지대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는 소리 없이 고여 있는 늪과 나무와 새, 그리고 억새만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이 모두를 힘껏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1-2분의 순식간이다. 오전 8시25분, 어느새 우리는 남에서 북한 땅으로 들어섰다. 
차창 밖엔 고동색 모자와 옷차림을 한 북한 병사들이 경계의 눈빛을 번뜩인다.
북측 출입사무소 스피커에선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TV에서 들어본 그 노래가 앙증맞다. 

별로 까다롭지 않은 수속절차는 그간 수차례 거쳐 온 관례 때문인가 보다.
버스는 북쪽을 향했다. 예전에는 이동 중 북한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지만 주민들의 사생활이 침해받는다는 이유로 모두 이주를 시켰단다.  다소 떨어진 길에는 사람이 탄 달구지가 흔들거리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일터로 나가는 북한 주민들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팔년풍진(八年風塵: 여러해 고생함을 이르는 말) 모습이 역력하다. 맥이 없어 보이는 주민들의 모습이나 억지로 생을 버티는 것 같은 무, 배추 등 밭작물도 우리의 가슴을 서글프게 한다. 

9시10분 우리는 온정각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따뜻할 온(溫)자에 우물 정(井), 온정리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숙소 인근 도로에 내 걸린 플래카드가 이색적이다. 「우리식대로살아가자」 장난기가 발동한다. 이 뜻을 아는 사람?

이구동성, “자기네들 방식대로 살아가자는 뜻이지….”
“무슨 소리를, 우리가 팔아주는 밥값, 즉 식대로 살아가자는 것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야 어디 북한에서의 생활이 평온할까.”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금강산 중턱을 오른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설봉산 또는 개골산으로 불리는 금강산은 백문이 불여일견, 천하절경이다.
남명 조식선생의 ‘삼홍시’가 떠 오른다.

「천공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까지 붉더라」

산을 오르는 길은 꼬불꼬불 외길인데 막힘은 없다. 주고받는 무선통신이 차량교행을 용이하게 한다. 굽이굽이 극치는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우리는 이곳, 이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이제는 영원히 막히지 않는 이 길, 영원히 지켜 가야할 우리의 길이다. 

1014m의 망양대를 오르는 길은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돌계단과 철 계단으로 연결돼 있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지, 하지만 이 길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젖 먹던 힘까지 내는 거지.”

마음이 아프다. 언제나 마음 편히 오갈 수 있는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神)이 빚은 만물상도 마지막 추색(秋色)을 내뿜는 붉은 단풍도, 모두가 쓸쓸하다.

해빙기를 맞은 동토

산봉우리 마지막 계단을 올라설 때, “어데서 왔습메까” 낯선 목소리다.

“거제도에서요”
“거제도는 육지하고 연결됐습네까”
“예- 30년 전에 연결 됐지요”
“대우 삼성조선이 있다는데 그곳 여성동무들은 놀기만 한다면서요”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을 아시나요”
“고럼요 거제도서 온 여성동무들이 얘기해 줬습네다”

정말 놀랍다. 산악구조대원을 자칭한 북한 청년들은 어려워하지도 않고 또한 똑똑했다.
단체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는 건네받았다.

“자- 찍습네다 하나 둘 셋”

이곳 북한이 정녕 정(情)이 얼어붙은 동토였던가, 봄이면 대동강 얼음이 풀리듯 한반도의 봄볕에 54년간 얼어붙은 동토가 풀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건강하시라요”
“건강하세요” 나도 몰래 미간엔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멀리 보이는 동해, 그곳에 곱게 펼쳐진 명사십리(明沙十里)는 스케줄에 짜인 발길도 아랑곳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꾸만 머물게 할 뿐- 고사리를 파는 아가씨도 막걸리는 파는 아낙도 역시 남남북녀(南男北女)다.  

금강산식후경(金剛山食後景)이라더니… 혼 나간 듯 구경만 하다 보니 너무나 출출하다. 
광개토식당의 버섯전골로 배를 채우고 금강산 온천에 몸을 담갔다. 피로도 녹아들고 한겨레 동포애도 내 몸 속으로 녹아든다.

상팔담 풍광 상상초월, 갖다 붙이면 새 전설도 새록새록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가슴속은 환희에 젖었다.

더 아쉬운 건 정(情)

오후 6시30분 금강산 교예단 공연은 금강산 관광의 백미(白眉)다. 그들은 실수를 범치 않는 기계다. 아니 그들은 예술의 극치를 연출하는 신(神)이다. 애잔한 감동에 쉴 새 없이 가슴 속으로 눈물을 쏟는다. 어느새 연민의 정은 제동장치가 풀려버렸다.

그냥 무대 위로 뛰어 올라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무조건 힘껏 껴안고 몸부림 치고 싶다. 왜 이처럼 더디었는가, 반세기 동안 맺힌 한(恨)을 피로서 쏟고 싶다.

내 어찌 저들을 두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저들을 맘껏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방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은 깊어 간다. 북한의 대표적인 술 ‘들쭉술’도 내 마음을 달래지 못하는지, 자꾸만 인민배우들의 아름다운 자태가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여자는 세 가지 유형이라더니

세상의 여자들은 세 가지 유형으로 첫째는 바보 형, 둘째는 악마 형, 셋째는 천사 형이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 합류한 신현농협 주부대학 회원 및 효도관광 회원들은 모두가 마지막 형, 즉 천사 형이다.

서로가 보살피고 봉사하는 마음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었다. 차에서 내리는 노모를 서로가 부축하는 모습에서, 또한 피로에 지친 동료들에게 물이나 과자류를 나눠주는, 서로를 보살피는 모습에서 그들은 날개만 없을 뿐 분명 천사였다.

아홉 마리 용(龍)이 살았다는 ‘구룡연’ ‘상팔담’을 오를 때도, 해금강과 인근의 삼일포를 둘러 볼 때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비무장지대를 지나칠 때도, 남을 위한 그들의 배려 정신은 변함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 간혹은 북한 주민들이 손을 흔들 때면 우리의 천사들은 더 큰 손 흔듬을 아끼지 않았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이 인솔자의 명령에 길가에 쪼그리고 앉을 때는 더 없이 가슴아파하는 모습에서 정녕 우리사회는 정이 흐르는 사회, 더욱 밝아오는 지역사회를 기대해도 좋을 성 싶다.

어느새 도착한 우리측 출입사무소, 그 곳엔 어스럼이 내리고 있다.
아쉬워 바라보는 북쪽 하늘은 문득 그리움으로 각인된다. 이 모든 아쉬움은 맘껏 즐기지 못한 그곳 관광여정 때문이 아닌 성 싶다.

언제 또 한민족의 따뜻한 정을 다시 느껴 볼 수 있을까, 언제 또 아름다운 인민배우들의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더 아쉽다.

어둠을 가르고 자정을 뚫으며 귀향하는 버스 속은 포근하다. 취재하고 편집하고 또 인쇄를 해야 하는 틀에 박힌 내일을 기약하며 금강산 기행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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