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봉 6.25참전용사회 거제시지회장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눈시울에 가득 찬 눈물을 들킬세라 길 떠나는 아들을 보지도 않은 채 "이놈아, 집 나가면 배고프다. 저것이라도 잡아먹고 가라"고 애원하듯 유일한 재산인 돼지를 가리켰다. 보리를 볶아 맷돌로 갈아 보릿가루를 만든 어머니는 아들의 허리에 자루로 단단히 채우곤 "꼭 살아 돌아오라"를 주문하듯 반복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은 시작됐다. 일제치하 36년의 시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같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당시 남북인구 3000만명 중 7분의1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1000만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기반시설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남과 북, 양쪽 모두에게 상처만을 남긴 6.25전쟁은 1953년 7월23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종식됐다. 아후 벌써 6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2016년이 됐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휴전상태다.

당시 20세 청춘이었던 임학봉 6.25참전용사회 거제지회장(87)은 징집 날 아침풍경이 아직도 선명하다. 'K1130857'인 군번도 머릿속에 또렷하다. 왜 전장으로 가야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대한 생각도 정립되지 못한 스무살 청년이었지만 '국가를 위해'라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든지 2개월이라는 짧은 군사훈련 뒤 청년 임학봉은 유엔 미3사단에 편입돼 정찰중대에 배치 받아 총구를 잡았다. 전우들은 정찰 도중 적군과 아군의 포탄에 가을낙엽처럼 죽어나갔다. 정말 무섭고 징그러운 전쟁이었다.

그 역시 1.4후퇴 흥남철수 작전이 펼쳐질 때 어깨를 다쳤다. 그리고 긴 병상생활을 하다 명예제대를 했다. 굳이 일기예보를 보고 듣지 않아도 날씨를 알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됐다고 말하는 임 회장이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시 20살로 돌아가도 전쟁에 나갈 것이냐는 물음에 임 회장은 짧은 한숨과 함께 "가야지. 후방에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없는 설움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며 되물었다.

임 회장은 "3년 전 경상도병무청에 유사시 군대에 입대를 하겠다는 지원서를 경상남도지부 지회장들이 다 냈다"며 "나이든 사람들이 하는 이 형태를 형식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 회장은 7년째 6.25참전용사 거제시지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막내가 85세이고 최고령자가 97세로 평균나이 87세인 6.25참전용사 거제시지회의 인원은 380명 정도다. 며칠 전에도 두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전국에 생존해 있는 용사들이 1년에 몇 천명씩 세상을 떠난다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구찜을 쪄가고 광어회도 떠간다는 임 회장. 그러한 임 회장의 마음은 바쁘다. 곧, 금방, 조금 있으면 못 볼 것 같은 이들의 입에 맛난 것 한 점 넣어주고 싶고, 좋은 경치 한 번 보여주고 싶어서다.

꼭 회장이어서가 아니라 이심전심이고 측은지심이며 동병상련일 것이다. 그들의 대변인인 임 회장은 그래서 87세의 노구에도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는 "6.25 참전용사인 우리들이 다 죽고 나면 6.25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6.25를 알면 6.25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록 죽고 없더라도 우리 후세들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 전쟁 없는 세상 살아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 '안보'는 국가차원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가르치고 우선시 돼야 할 부분"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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