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위숙/계룡수필 회원

선산에 갔다. 긴 여름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풀은 자랄대로 자랐다. 여기저기 마음껏 자란 풀들은 사람 앉은키를 넘본다.

멀쑥하게 자란 쑥이며 고사리에 가린 봉분들은 비석이 없다면 어느 조상의 묘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키 큰 풀들을 한 움큼씩 힘껏 뽑아본다. 뿌리와 같이 누런 흙이 딸려 나온다. 흠뻑 패인 자리가 휑하다.

마른 흙들이 블랙홀로 빨려들듯이 흘러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운다. 우툴두툴 고르지 못한 뒷자리는 수술자국을 보는 듯하다.

오랜 병원 생활끝에 생을 마감한 아버님의 아픔을 대신 말해준다. 한 낮의 열기에 나뭇잎들은 꿈쩍을 않는다. 대신 예초기 쇳소리만 적막한 산을 타고 울린다. 뜨거운 햇살 속에 서있는 마른 나무 한 그루.

오늘따라 더 외로워 보인다. 푸른빛을 잃은 소나무. 그리고 이미 말라 버린 곁가지들. 옅은 바람에도 가지들은 금세 내려앉을 것만 같다.

제 빛을 잃은 잎들이지만 나뭇가지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손이라도 대면 우수수 흘러내릴 것만 같다. 발밑에서부터 송악이 허리까지 감싸 안아도 묵묵히 참아낸다.

말라비틀어진 소나무 몸을 감싸고 푸른 잎을 더욱 발하는 송악. 건조한 표피에 잘잘한 뿌리를 내리며 수십 미터까지 타고 올라간다. 살아있을 때는 같이 우정을 나누었을 터인데 죽어 갈 때는 혼자만 죽게 내버려 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에 의지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동안 ‘너 아니면 못 살 것 같다’며 말을 하던 송악도 ‘네가 죽어도 나 홀로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숨겨둔 채, 네 몫까지 살겠다며 소나무를 위로했던 것일까.

손으로 표피를 떼어본다. 상처에 앉은 팥죽색 딱지가 뚝뚝 떨어진다. 마른 몸피는 수분을 잃어 갈기처럼 갈라졌다. 야윈 가지는 소매안으로 들여다 본 아버님의 팔뚝처럼 비틀어져 있다.

윤기를 잃고 퍼석거리는 잎들은 마치 한 움큼씩 빠지던 머리숱 같다. 푸른 송악속에 숨어있는 나무 몸통은 비쩍 마른 아버님의 몸 그대로다.

우듬지에 힘겹게 달려 있는 잎들은 즐겨 사용하던 모자를 연상케 한다. 한더위에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 또한 병중일지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비록 푸른빛을 잃었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푸른 옷을 입은 강대나무를 보며 아버님을 추억한다.

아버님은 과묵하셨다. 내가 서너 가지를 물어보면 대답은 겨우 한마디이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버님의 침묵은 나무와 같았다. 아니 그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무 속 같았다.

그런 아버님으로부터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 건 작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시는 뒷모습을 본 후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일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님께서 마음을 내보여도 좋을 만큼 나는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버님의 속은 서서히 생명줄을 놓아버린 강대나무였던 것이다. 송악이 기세 좋게 뻗어 이미 내 의지를 상실한 나무였던 것이다.

그 몸으로 긴 한숨을 토하며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던 그때의 무거움을 잊을 수가 없다. 생각하면 지금도 명치끝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낀다.

강대나무는 제 힘으로 벌을 끌어 들이지 못했다. 그러기에 송악이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끌어들여 줌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만족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님은 홀로 마음을 삭였다. 세찬 비바람을 송악이 감싸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몸을 지탱하고 있다면 공생이 된다.

온기를 잃어 차가워진 몸을 감싸준 송악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강대나무를 바라본다. 살아있는 나무들 가운데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강대나무. 성치 못한 몸으로 가시는 날까지 꼿꼿하게 사셨던 아버님을 만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으셨던 아버님의 교훈을 되새긴다.
‘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간 나를 보호해 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내가 가는 길에 작은 돌을 치워 주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앞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강대나무를 보며 내 삶을 되돌아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도 생각해 본다.
저 나무도 외로움에 떨고 있는 것일까. 청정한 소나무들을 보면서 그 안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을 느껴보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지켜보니 그래도 생명을 다한 나무 한 그루를 위해 자리 하나 마련해 준 옆의 나무들이 고마워진다.

모든 외로운 것들은 그 안에 깊은 상념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념이 내 발목의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욕망의 안쪽과 바깥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나와 한 발짝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나무와의 경계를 생각한다.

볼품없는 강대나무 한 그루가 건네주는 이런 저런 생각과 교훈이 이 아침 나의 상념을 움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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