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을 날아 이름도 낮선 도시 사마라(Samara)에 닿았다. 뉴 밀레니엄의 설렘이 한창이던 20세기의 끝에서 러시아는 중국에 이어 또 다른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연한이 다된 시골버스처럼 불편하고 무서웠다던 러시아항공 에어플로트는 이제 여느 항공사처럼 깔끔하게 단장됐고, 환승을 위해 내린 모스크바 공항은 옛 소련의 살벌함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연착으로 인해 새벽에 떨어진 사마라는 어둠 속에서도 왠지 분주해 보였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도로정비가 한창이었던 탓이다.

두어 시간 쪽잠을 자고 공식 일정으로 사마라시청을 찾았다.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을 맞으며 드러난 도시의 풍경은 이 도시가 지닌 잠재력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유럽에서 제일 긴 볼가강의 중심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도시, 2차 대전 당시 임시수도로 사용돼 잠시나마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던 경험을 지닌 도시, 27개의 공연장을 가진 문화적 자양이 충분한 도시로서의 위용을 잠시 동안의 이동시간에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유럽 도시들을 많이 다녀본 나로서는 이 도시가 가진 정체가 몹시 궁금해졌다. 120만명의 인구에 3000명이 넘는 고려인이 사는 이 도시가 그간 왜 이렇게 감춰져 있었을까. 의문은 러시아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유리 가가린의 흉상이 있는 그의 이름을 딴 시민공원에서 풀렸다.

그렇다. 냉전 시대 치열했던 군비와 우주개발 경쟁의 시기에 이 도시는 전략적으로 서방 세계에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름도 10월 혁명의 지도자 이름을 딴 '쿠이비셰프'에서 1991년에 '사마라'로 바뀌었으니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주박물관에 들렀을 때 해설자의 모습에서 이들이 가지는 무한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우주인 양성소는 사마라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첨단의 미래공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도시의 현재 모습은 그러나 몹시 위축돼 보였다. 경제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항공 개발의 명분 뒤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온 도시와 도시민의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사마라인들은 한국이든 중국이든 가리지 않고 짧은 시간에 급성장을 이뤄낸 사람들과 협력하고 싶어 했다.

지정학적으로 사마라는 동서양의 연결점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신 실크로드의 중심에 서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오픈해 놓고 있었다. 옛 도심의 정비를 위해 9개 구역의 복원사업도 진행 중이었다. 단 이 영역만큼은 본인들 손으로 하겠다는 고집도 느껴졌다.

며칠간의 일정으로 나는 이 도시에 한 표를 던지기로 했다. 마치 천연 미인처럼 풋풋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잠재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수문을 열어 놓았는지 빠르게 흐르는 볼가강의 물살이 도도함을 넘어 서고 있을 때 나는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어디서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대 아마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게 아닌가 싶다. 제목은 '볼가강의 뱃노래'인데 러시아 말로 발음하면 '에이 우흐넴' 이라고 한다. 번역하면 '여보게들 노를 저으세!' 라고 한다.

번역된 가사를 보면 볼가강 주변의 숲에 벌목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배의 닻줄을 끌며 힘든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부르는 일종의 노동요다. 마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멸치 털 때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이 노래는 노동요를 넘어 러시아를 대표하는 민요가 됐는데 거기엔 전설적인 저음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역할이 컸다. 요즘도 '레드아미 코러스'같은 러시아 대표 합창단이 내한공연을 할 때면 이 곡은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가 됐다. 특히 이 노래는 '아이다다 아이다'라는 후렴구를 가지고 있는데 힘을 내어 보자는 선창자에 이어 '어기여차 디여차' 같은 의미로 제창을 하는 형태다.

이렇게 '메기고 받는' 형식은 우리 민요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으니 학술적인 것을 따지기 전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가사를 보면 '태양을 향해 노래 부르세'와 '오! 너 볼가강아 어머니같은 볼가강아'라는 표현이 나온다.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작렬하는 태양에 맞서며 아픔을 성취로 승화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또 볼가강에 대한 표현에서는 그들의 삶터에 대한 무한 애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고통이 엄습하는 태양 아래 있다. 그래도 우리의 삶과 터에서 어머니의 안온함을 잊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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