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원 칼럼위원

▲ 윤성원 거제불교거사림 2기 학생회장
비가 온다고 이야기 하면 그 말을 믿고 준비를 한다. 믿음은 사람의 정신적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 삶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믿음의 가치관이나 태도는 작게는 자신부터 크게는 사회 전체, 나라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든지 반영된다.

믿음에서 오는 종교와 정치적 선택은 개인의 자유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우리는 유일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내 믿음이 최고다 주장하며 개종을 강요하고 끊임없이 믿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

믿음을 바꾸게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믿는 우월성을 확신하고 그것만이 절대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고통과 번뇌는 개인의 삶에 크나큰 폐가 될 수 도 있다.

어떤 이익 앞에서는 아무래도 자신의 믿음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 믿음을 내세워 정당까지 출현했을 정도로 믿음의 정치참여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한때 불교는 왕사 혹은 국사(國師)라는 이름으로 결정권자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언제나 큰 견제 대상이 됐다. 부처님은 첫째도 보시라하시고, 큰 자비를 가지고 사람과 사회에게 베풀라 했다. 리더가 인색하면 복덕이 줄고 삶이 초라해진다. 믿음으로 정직과 성실함 속에서 사람에게 신뢰가 모이고 재산은 물질이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라 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리더는 친절하고 부드러워야하며 사람에게 화합할 줄 아는 성품을 가진다. 독선적인 리더는 외롭고 일이 순조롭지 않으며 사회 사람에게 저항을 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증오심이나 적대적인 생각은 사회를 늘 시끄럽게 한다. 따라서 사람을 믿음으로 존경해야 하고, 이렇게 실천하면 복덕이 사회에 떨치고 복이 모인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준이 잡히지 않아 사회가 궁해서 믿음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자랑스러운 지역의 최고기업이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쇠퇴한다면 물질은 변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은 변할수 있다.

사람은 안락과 행복을 위해 종교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의 세계는 모든 것이 믿음과 인연에 의해 얽혀 있어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 생활이나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하지 않는 믿음의 논리들이 너무나 많다.

상황에 따라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삶에 방해되는 요소들이라면 관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번뇌가 적을수록 삶은 쾌적하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사회 믿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영원히 힘들고 풀리지 않으며 도달하지도 못하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은 헛되이 보내는 일이다. 불교의 믿음과 교리에도 공(空)과 유(有)를 혼돈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익 없는 논리들에 대해 용수보살은 '희론'이라 말씀 하신다. '희론'이란 믿음이 아닌 현재의 표현으로 쓸데없는 소리 정도의 뜻이다.

우리는 삶에 이익되지 않는 것에 유혹 당하지 않아야 한다. 또 내가 잘난 것이다, 네가 잘난 것이다 하는 논쟁에서도 벗어나 있어야한다. 부처님 법과 관계없는 이론들, 즉 믿음에 벗어난 것은 무시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존재하는 모든 법이란 꿈과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고 하셨다. 존재의 허망함과 가치 없음을 갈파하신 것이니 이처럼 세상을 봐야 한다. 믿음에서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법 혹은 진리라는 것도 결국 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최상의 믿음과 진리라는 집착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회를 응대하고 생각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는 아름다워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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