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완 리우 장애인올림픽 사격 국가대표

지난 4월,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위한 장애인올림픽선수단 선발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사등면 김수완 선수(35)가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변변하게 구성된 장애인협회도 없이 비장애인들을 위한 거제시생활체육회 사격협회 안에서 동아리식 활동을 하고 있는 김 선수의 쾌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사격에 입문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가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이도 있었다.

사격을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나면서 평균적인 선수들의 기량을 따라 잡았다는 김 선수. 그의 사격 실력은 지난해 초부터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고 한다. 김 선수의 기량은 지난해 11월 열린 전국체전에서 빛을 발했다. 금메달 3개와 동메달 2개를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 대망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그는 "생활체육으로 시작했던 사격이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면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고, 온 동네에 현수막이 걸려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6월25일 새벽에 일어난 교통사고는 30살 젊은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밤 12시가 넘는 시간까지 이어진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그의 차량은 빗길에 미끌어지며 전복됐고, 그는 가슴아래 모든 신경을 잃었다.

당시 김 선수는 1남2녀의 외아들이자, 2살배기 아들을 둔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2년이 넘게 이어진 병원생활 속에서 자신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어하던 아내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단란했던 가정은 깨졌다. 다행이라면 그렇게 옆에 두고 싶었던 아들은 지켰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장애인 아빠를 둔 아들"이라며 "사춘기를 잘 보낼 수 있을 지가 벌써 걱정이 된다. 인성이 착한 아이로 자라주면 좋겠다"고 한없이 미안하기만 한 아빠의 크고도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대소변 해결이 되지 않아 방광에 호스를 끼워 생활하다 방광염 때문에 40도가 넘는 고열 속을 오가고, 대소변 실수 때마다 찾아오는 자괴감은 그를 괴롭혔다. 매순간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결국 그는 아들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김 선수는 자신을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마음정리를 빨리 하고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사격에 입문하기까지 주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비(自費)로 산 권총 때문이었다. 그는 왼손잡이다. 사격에 입문한 2014년 당시 협회에는 왼손잡이용 권총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김 선수가 사격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 400만원이나 하는 권총을 당장 구입했다고 한다.

사고 후 한 마디 말없이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무뚝뚝한 농사꾼 아버지의 마음이, 다시 일어나기를 준비하는 아들을 위한 지지로 표현된 것이다.

장애인이 된 아들은 "총이 너무 비싸 그만둘 수도 없었다"는 말로 아버지의 마음을 안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현수막을 달고 싶다'라고 한 것은 자랑스러운 아들이기를 원하는 그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장애인증을 가슴에 품고 휠체어에서 올려다 본 세상은 두려움 자체였다고 말하는 그는 "인생의 목표도 꿈꿀 수 없는 나에게 인생의 목표를 준 것이 사격"이라며 "사격은 내 삶의 전부"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인생은 다른 궤도로 바뀌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한 뒤 새롭게 시작을 하고 있다"며 "아이와 부모님과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