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지 수필가

▲ 황광지 수필가
배우 차태현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가 아니라서 좋아한다. 그저 웬만큼 생긴데다 유쾌한 성품은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을 만큼 편안함을 준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괜히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이다.

세 아이의 아빠인데 자녀를 재미있게 돌보는 태도도 좋고, 소탈하면서도 찌들지 않고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매력이다. 그러니 이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개봉되면 나는 재빠르게 관람하려고 한다. 내 나름대로 팬으로서의 예의를 다하려는 것이라고나 할까.

배우 차태현을 만나려다가가 감독 김영탁에게 반해버렸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의 개봉을 앞두고 홍보 차 출연한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온 김영탁 감독을 봤다. 낯선데다 텔레비전 출연이 익숙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는 그에게 관심이 갔다. 함께 출연한 차태현이 '돈이 안 되는 독특한 감독'임을 에둘러 소개했다. 김 감독은 이번 영화로 돈을 어느 정도 벌면 '진짜 지루한 영화' 한 편을 찍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다른 토크는 진행자들이 질문할 때마다 얼버무리는 식이었는데 이 포부만은 확실하게 밝혔다. 요즘 영화는 스피드와 자극적인 요소가 넘쳐나야 성공할 수 있을 텐데 지루한 영화라니. 게다가 '진짜 지루한' 영화라니. 흥행과 배우 개런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작품을 찍고 싶어 하는 그의 의지가 역력했다.

제목이 '슬로우 비디오'인데 지루할까? 아직은 돈을 좀 벌어야 하니 어느 정도는 흥행을 감안했을까? 하는 저울질을 하며 영화를 보았다.

김영탁 감독은 '헬로우 고스트'에 이어 두 번째 영화 '슬로우 비디오'도 차태현과 함께 만들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뛰어난 동체시력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괴물이라는 놀림을 받아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다. 성인이 될 때까지도 집에 꽁꽁 박힌 채 텔레비전에 빠져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그는 CCTV 관제센터에서 일하게 되고 화면을 통해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동체시력은 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능력이다. 모든 것을 슬로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주인공을 통해 느리게 사는 세상을 따뜻하게 그렷다. 이웃을 지켜봐주는 눈 CCTV, 동체시력 덕분에 슬로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이 세상에서 따뜻함을 불어넣어준다. 그로 인해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허술한 사람들이 모습이 정답다.

뮤지컬 배우가 꿈인 봉수미, 박사과정을 마친 나이 많은 공익근무요원 병수, 주인공을 제 아들처럼 아끼는 안과의사, CCTV 관제센터의 어수룩한 직원들, 버스운전기사 상만 등 영화 속 인물은 모두 슬로우 인생이다. 잠깐 등장하는 범죄자도 어설픈 인물로 그려놓아 관객에게 무한한 편안함을 선사한다. 김영탁 감독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려하는지 나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패스트'한 세상에 대항하는 슬로우 푸드, 슬로우 시티 같은 것을 지향하며 세상을 본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운동도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김영탁 감독이 믿고 캐스팅한 차태현을 내세워 슬로우 세상을 추구하려한 이야기에 나는 조금은 편파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호감을 가진 배우에다 '지루한 영화를 꿈꾸는 독특한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졌으니 매우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뭇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연기를 곁들인 배우를 바라보는 것으로 스트레스에서 치유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에 관객이 많이 들어 꼭 '진짜 지루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상당한 돈이 감독에게 안겨지길 기원해 보았다. 극히 리얼리티를 지나치게 떨어뜨려 지루한 면이 있다는 영화평이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동의하지 않고 '잔잔한 평화'라고 평한다. 이제 나는 김영탁이라는 슬로 인생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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