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80년대 중반, 어른과 어린이가 듀오를 이뤄 부른 노래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명배우 안소니 퀸과 찰리가 부른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란 곡은 "아빠, 난 언제 어른이 되나요"라고 번안돼 안소니 퀸의 역할을 최불암이 대신하면서 '아빠의 말씀'이란 곡으로 인기를 얻었었다.

번안 가사가 아들의 자립심을 키우면서도 늘 아빠가 든든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는 내용으로 돼 있었는데 안소니 퀸이나 최불암 모두 중저음의 목소리가 주는 안정감으로 인해 신뢰와 따뜻함을 주는 노래였다.

한편 묵직한 '아빠의 말씀'에 대비되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규대와 이자람 모녀가 부른 '내 이름 예솔이'가 그것이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니, 너 말고 네 에비~"라는 가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했던 곡이다.

이규대는 이 곡 외에도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재미와 일상을 담은 노래들을 여러 곡 발표했는데 지금 보니 어린이 가요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규대의 딸 이자람은 잘 알려져 있듯이 국악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단순히 소리꾼이라 하기엔 작업에 대한 열정이나 접근 방식이 남다르다. 아니 인생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고 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이자람에게 '이 시대 보편적 고민을 판소리로 풀어낸 독창적 소리꾼'이란 찬사가 따라 다니는 것이다.

21일부터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 올려진 신작 '이방인의 노래'는 남미 문학의 거봉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이자람이 직접 대본을 쓰고 소리까지 만들어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이자람은 어느 인터뷰에서 "나를 건드린 것"이라고 표현했다.

남미 소설을 여러 권 사서 보던 중 이 작품이 자신의 내면을 건드렸다고 이해되는 대목이다. 내가 이자람을 주목하는 이유는 자칫 경직되거나 전통 속에서만 갇혀 있기 쉬운 국악인이 자신의 작업 영역에 매번 건드림을 당할 때마다 내어 놓는 새로운 시도와 고민에 있다.

이전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판소리로 풀었던 '사천가'와 '억척가', 주요섭의 단편 소설 '추물'과 '살인'을 원작으로 했던 '판소리 단편선' 역시 그런 건드림이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오래 전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했던 노영심이 변진섭과 '희망사항'을 히트시키고 있을 때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이순신 소재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어 보고 싶을 때여서 혹시 뮤지컬 작곡도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노영심은 "못할 건 없다. 단지 관심을 가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존재할 뿐이다.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생기면 그 때 도와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이자람에 노영심이 오버랩되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주체적이고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게 하는 예가 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기본적으로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종류에 따라선 완창을 하는데 8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소리꾼과 고수가 극을 이끌어 나가지만 학문적 영역에선 음악보다 오히려 문학쪽이 더 가까워 보인다.

성행 시기나 서사적 구조 때문에 서양의 오페라와 곧잘 비교되기도 한다. 판소리가 중국의 극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는 그림이 있다.

김홍도의 그림 중에 '이야기 장수'라는 작품이 있는데, 한 사람이 책을 들고 이야기를 하고 해금, 피리, 북이 반주를 한다. 중국 광둥 지방의 강창 음악인 탄사(彈詞)는 소리꾼이 기악반주에 맞추어 노래(소리)와 아니리(말)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들은 해외에서 훨씬 더 각광받고 있다. 원작에 대한 사랑과 그 서사성을 1인 음악극으로 풀어 나가는 소통방식에 좋은 반응을 보내고 있다고 보인다.

이자람은 록 포커 그룹을 결성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열려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인생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녀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여태까지처럼 제 앞에 주어진 일들을 무사히 잘 마치고, 주변 사람들과 계속 함께 걸어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깨어있고 싶고요. 엉뚱한 욕망이나 두려움이 저를 잠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동료들과 계속 판소리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게 재미있으면 좋겠고요. 소박한 꿈들이 이뤄지는 게 제일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늘 긴장합니다.(웃음)"

이자람의 평범한 인터뷰가 울림으로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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