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 작품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라는 작품이 있다. 바그너의 유일한 코미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68년 뮌헨에서 발표됐지만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는 20년이 넘게 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20년 동안 바그너가 이 작품에만 골몰한 건 아니지만 일찌감치 컨셉을 잡아 놓고 숙성시킨 것만은 사실이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대부분 그러하지만 이 작품도 가벼운 희극치곤 다섯 시간이라는 무거운 공연시간을 감당해야만 끝을 볼 수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공간적 배경은 1500년대 뉘른베르크의 한 교회다. 이 곳에서는 명가수(마이스터징거)를 뽑는 경연대회가 준비되고 있다. 여주인공 에바의 아버지는 노래경연에서 1등을 차지한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한다. 에바는 내심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매력남 발터가 우승하길 바란다.

하지만 발터는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전년도 명가수와 에바의 아버지 포그너, 마음씨 고약한 공무원 베크메서 그리고 시인이자 구두장이인 한스 작스가 심사위원으로 등장한다. 예선을 마친 발터는 형편없는 실력으로 노래를 마치고 만다.

심사위원인 베크메서는 자신이 직접 경연에 참여해 1등을 차지한 후 에바를 차지하겠다고 온갖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그런 와중에 재치 있는 한스 작스는 자신의 제자인 다비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터의 재능과 숨은 감성을 발견하고 조력자가 돼줘 결국 발터의 우승을 이끌어 낸다는 얘기다. 당연히 발터는 에바를 얻게 되고 명가수조합의 회원 자격을 얻게 된다.

줄여놓으니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오페라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나 숨은 장치는 결코 적지 않다.

등장인물 중심으로 보면 젊고 낭만적인 연인 에바와 발터가 중심에 있고 주인공 커플을 돋보이게 해주는 다비드와 막달레나 같은 양념 조연 커플이 있다. 마치 방자와 향단이 같은 설정이다. 당연히 비호감인 악역 베크메서 같은 인물의 끊임없는 방해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희극 오페라의 도식적 배역에서 중요시되는 인물은 따로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백작과 여주인공 '로지나'의 결혼을 성사시켜준 '피가로'나 '돈 파스칼레'에서의 닥터 '말라테스타' 같은 인물이다. 일종의 중재자 역할로서 결국 긍정적 결론의 도출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인물인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는 한스 작스가 바로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지만 한스 작스의 역할을 단순히 중재자로 국한시키기엔 그가 끊임없이 내어 놓는 화두나 제안들이 대단히 원칙적이면서도 혁신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그너는 한스 작스를 통해 그가 선호하는 주제인 '남성적인 자제나 양보'를 표현해낸다.

아울러 젊고 충동적인 발터에게 전통시의 규칙과 전통음악기법의 전통을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부분에선 엄격함을 넘어 세대 간의 바람직한 연결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명가수를 조련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시사점을 보여 주는 한스 작스는 그래서 실질적인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바그너는 '발터'라는 야심만만한 천재 청년을 통해 사실은 자신 속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예술성과 창조성을 한스 작스의 성숙하고 설득력 있는 지혜를 빌어 조정하고 화해시킨다.

20대 총선이 새누리당이 제1당의 위상을 내놓으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놓은 채 종결됐다. 선거 결과에 대한 관전평이나 논평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선거 직후 모 방송사에서 보여준 역대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의 책임자들이 발표했던 담화 모음을 보니 "민심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놀랍도록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이런 상투적인 사죄성 멘트나 비상대책위 같은 구조에 관심이 없다. 그렇게 창의적이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는 상투적 수사를 더 이상 접하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민심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는 것이 역사 속에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기본이자 원칙이다. 그 탄탄함 위에 명가수가 탄생하듯이 우리 정치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정치사에서 정말 제대로 된 한스 작스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누구든 더 이상 경박한 언어로 가두는 실수를 반복해선 아니 될 일이다. 정치의 성숙은 국민의 성숙 위에 피는 꽃이란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아닌가. 우리 스스로 한스 작스를 지향해야 할 시점이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