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나라에 변화(卞和)라는 옥(玉)을 다루는 장인이 있었다. 어느 날 형산(荊山)에서 천하의 보물이 될 만한 옥 덩어리 원석을 발견하자 이를 여왕에게 바쳤다. 왕은 세공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그냥 돌멩이에 불과하다고 하자 왕은 임금을 속인 죄로 왼쪽 발꿈치를 잘라버리는 월형에 처한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다시 그 옥의 원석을 바쳤지만 역시 돌덩이로 취급 받아 이번에는 오른쪽 발꿈치를 잘린다. 그러나 문왕(文王)은 옥공에게 그 돌멩이를 잘라보라고 시켰는데 그 속에서 천하의 명품인 보옥이 나왔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의 고사다.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이 옥을 얻어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옥새(玉璽)를 만들게 한다. 이후 황제의 도장을 새(璽)라 하고 대를 이어 전해지므로 전국새(傳國璽)로 불렸다. 도장은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크기나 인재(印材)가 달랐는데 황제는 옥, 왕은 금, 왕족과 왕비는 은(銀), 개인은 석재(石材)나 목재(木材)를 사용했다. 도장을 흔히 인장(印章)이라 하는데 이는 한나라 때 하급관리의 관인을 인(印), 고위관리의 관인을 장(章)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옥새는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의 즉위는 옥새를 받아야만 비로소 왕이 된다. 그러므로 변란 때에도 가장 먼저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것이 옥새였고, 소위 정치쇼로 불리는 왕의 선위파동 때에도 옥새를 앞세운다. 이 옥새는 도승지의 책임 아래 상서원(尙瑞院)에서 관리했다.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 당시 승지였던 성삼문이 옥새를 건네주지 않고 안은 채 통곡한 일이나, 1910년 경술국치 때 순정효황후 윤씨가 옥새를 넘기지 않으려고 치마폭에 감췄다는 일화는 옥새가 바로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싱겁게 타협되고 말았지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5개 지역구 무공천을 선언하며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일어난 '옥새 파동'이 나라를 한번 휘젓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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