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평택에 살던 일곱살 신원영군은 결국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됐다. 범인은 원영군의 계모와 친부라고 한다.

최근에 계모가 개입된 학대나 살인사건이 연이어서일까. 사건의 패턴이 이제 너무 익숙하다. 학대의 수법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그들이 자식을 죽여 놓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주고받았다던 문자메시지를 접한 순간,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이 이상 바닥이 어디 있을까 망연자실해졌다. 우리 애들이 이 뉴스를 어떻게 볼까, 부모된 입장에서 괜히 애들 보기가 민망해졌다.

원영이가 숨진 시점은 잇따른 아동학대 사망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충격에 휩싸여 있던 때다. 그런 와중에도 원영이 부모의 학대는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경악스럽고 이는 우리사회의 인간존엄에 대한 지수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는 정황처럼 읽히기도 했다.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사회가 유교적인 전통에 기반 하다 보니 부모자식 간의 존중과 사랑이 늘 과잉상태였고 당연히 자식에 대한 학대는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았었다. 자식을 독립개체로 보기보단 부모의 연장으로 인식하다 보니 남의 집 자식문제에 개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런 친족 간의 관계에 대한 맹신이 있었고 세상이 바뀌어 살벌하고 광포해진 시대를 살면서도 "설마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할려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아동학대로 사건화 된 사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숨겨지고 덮혀 넘어간 사건까지 들추면 정말 끔찍한 우리의 자화상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 중 계모에 의한 아동학대 살인사건만 모아 봐도 2007년 평택, 2011년 울주, 2013년 칠곡, 2014년 울산, 2016년 부천에 이어 다시 평택까지.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2014년 3월 울산사건 이후 아동학대 종합대책이 발표되고 그해 9월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된 뒤에도 여전히 우리는 유사사건으로부터 우리 애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계모와 관련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전 중에서 계모의 악행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콩쥐팥쥐'다. 전주에 살던 최씨와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콩쥐는 친모 조씨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아비가 새로 맞은 배씨를 계모로 맞이하게 된다.

계모로부터 이복동생 팥쥐가 태어나자 콩쥐에겐 본격적인 시련이 닥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잃어버린 신발을 매개로 극적 반전을 이뤄낸다는 설정은 서양의 계모 이야기 '신데렐라'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요즘 같으면 필시 표절시비가 일었을 법하다. 행복을 예약한 듯 하던 콩쥐는 계모와 팥쥐의 계략에 의해 목숨을 잃고 팥쥐가 콩쥐 행세를 하며 행운을 가로채지만 끝내 주위의 도움으로 콩쥐는 환생하고 감사는 팥쥐를 처형해 그 시체를 항아리에 담아 계모에게 보내며 응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장화홍련전' 또한 유명한 계모 소재 소설이다. 장화와 홍련을 낳고 숨진 친모를 대신한 계모 허씨는 남편의 바람대로 아들을 낳지만 남편 배좌수는 두 딸을 애뜻하게 대한다. 이에 시기한 계모는 흉계를 꾸며 장화를 죽게 하는데 이를 안 홍련도 얼마 후 연못에 투신을 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두 자매의 원혼은 귀신이 되어 마을의 원님에게 억울함을 풀어주길 청원하고 원님은 계모 허씨와 공모자 장쇠를 처형한다. 배좌수는 셋째 부인을 맞이해 쌍둥이를 낳아 행복하게 사는데, 이 쌍둥이가 환생한 장화홍련이었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다시 상기해 보니 요즘 벌어지고 있는 계모들의 악행이 꽤 뿌리가 깊어 보인다. 조금씩 각색돼 영화로도 소개됐던 적이 있는 이들 작품이 거의 호러물이었던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아시아 지역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계모설화의 기본형은 계모가 무당과 짜고 "아이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며 남편을 꼬셔 아비가 아들을 백정에게 데려가게 만드는 것이다.

계모이야기의 숨은 그림을 찾아보면 새 아내의 술수에 놀아나며 자기 자식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친부가 드러난다. 그런데 요즘 계모 사건의 가장 큰 변화는 아내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어수룩한 아비가 아닌 계모의 악행을 방조하거나 공조하는 기가 막힌 천륜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계모의 계(繼)는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세상에 어찌 나쁜 계모들만 있겠는가. 친모의 사랑을 그대로 이어가는 좋은 엄마, 계모도 많을 것이다.

이혼률이 높아가는 현상은 현대사회의 큰 흐름일 수 있다. 달리 보면 그 어느 시대보다 계모의 양산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이, 사랑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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