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내 계룡수필 회원

(남편을 따라 나선다. 남편의 군대동기생들 모임이라 혼자서 갔는데, 이번에는 부인들도 같이 자리를 하게 되어 모처럼 부부동반 외출이다. (오랜만에 여객선을 타본다.) 원래는 네 시 배를 탈 예정이었으나 앞당겨 두 시배를 탔다. 바람이 센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풍랑 주의보가 내릴 것 같아 서둘렀다. 만약 배를 못 타게 된다면 버스로 한참 둘러가야 하니 약속시간보다 좀 이르더라도 그게 나을 곳 같았다.)

(오랜만에 여객선을 타본다.)파고가 여간 아니다. 얼마나 더 센지 여기저기에 멀미로 괴로워하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평소 배 멀미를 하지 않던 나도 오늘은 영 힘에 부친다.

속이 뒤틀려 토할 것 같다. 금방 도착 할 거라며 마음을 진정 시키려 애를 쓴다. 슬쩍 남편을 쳐다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들을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하기야 내 마음도 설레는데 남편은 오죽 할까 싶다.

그 어떤 우정보다도 더 돈독하다는 군대동기생들과의 만남이니 이 정도의 파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 그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들, 군 친구들과의 깊은 정을 귀가 닮도록 들어온 터이니 어찌 그 마음을 모르리.

남편은 당시 여덟 명이 한 내무반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여덟 명이 다 만나지 못해 섭섭했지만 연락이 닿는 네 사람이 모임을 가졌다.

이번에 허민영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남편의 거처를 알고 삼십오년만에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는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처음이라 서먹할 것은 당연지사일진데 왜 이리 설레고 흥분되는 것인지.

남편이 하도 그들 애기를 하는 통에 얼굴도 모르는 부인들에게 나도 미리 정을 주어버린 모양이다.

남편을 따라 나서긴 했어도 낯설음을 잘 타는 내가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남편들이 얼싸안고 난리다.

그들을 쳐다보는 순간 배 멀미도 잊었다. 어쩜 저리도 반가울까. 어깨를 토닥거리고 악수 한손을 어찌나 흔드는지. 한참 인사를 나누더니 나를 끌어당겨 인사를 시킨다. 그들이 반가워하는 것처럼 우리 여자들도 손을 맞잡는다.

참 이상하다. 거리감이 없다. 서먹하지도 않다. 마주치는 순간 따뜻한 눈빛을 보일뿐 이질감도 전혀 없다.

그들의 애기가 끝이 없다. 우리 여자들에겐 지루한 애기일 수도 있는데 아랑곳 않는다. 마치 여기가 군대인 것 같다. 한 잔의 술을 나누며 지난 세월을 끄집어낸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엔 찐한 눈물과 녹녹한 정이 배어있다. 우리 여자들도 그들의 애기에 차츰 귀를 연다. 

육십년대 후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립해 있는 군부대는 사실상 전시나 다름 없었다.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던 때였으니 더 말할 나위 없이 살벌했으리라. 실제로 작전 지역에서 남으로 침투해오는 간첩을 사살하기도 했다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정보부에 근무하던 병사들로 한발 빠른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 상황 이었으니 밤낮이 따로 없었다. 책상 하나로 낮에는 서류를 펼쳐 놓고 일을 했고, 밤에는 두 사람이 좁은 책상위에 부둥켜안고 잠시 눈을 부쳤다.

때로는 고향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다. 매일 같이 대형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북쪽의 방송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을 것이고, 또 고향과 가족들 생각에 허한 가슴을 부여안고 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그 때 그 상황에서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것은 같은 전우들이었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 서로의 등을 쓰다듬고 위로하며 우정을 쌓아 갔을 것이다. 뒤처진 전우를 놓지 못하고 기어코 같이 훈련을 마친 후 시커먼 얼굴을 마주보고 웃던 미소를 어찌 잊을 것인가.

피나는 훈련 속에서도 추위에 갈라지고 언 손과 발을 감싸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우정이 쉽게 잊혀 질 수 있는 것이던가. 그들의 돈독한 우정은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생사를 같이 한 전우였기에, 지금 사회에서 만나는 지인들과는 또 다른 연으로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쉬 허물어지지 않을 단단한 성벽처럼.

이순을 바라보는 초로의 남자들. 군대 애기를 하는 순간은 혈기와성하고 피 끓는 용사가 된다.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변화 했지만, 질긴 연의 단단함으로 결속된 그들의 참다운 우정을 누가 끊을 수 있을까. 스무 살의 청춘으로 돌아가 당시를 추억하며 나누는 사연 속에는 끈끈한 전우애가 배어 있었다.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사연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풀어내는 그들의 눈망울에 생기가 살아난다.

갖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최전방을 지키던 동료들. 힘겹고 고단한 군대 생활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정을 알았으며,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가는 끈기와 슬기로움을 배웠나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에도 당시의 힘겨웠던 사연들을 주저리주저리 엮어 내면서 어느 사이 일등병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몸의 거리가 있고 마음의 거리가 있다고 한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한 걸음에 달려 갈수 있는 그런 사이다.

좋은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향내가 더욱 깊고 그윽해 진다지 않던가.
그들의 우정이 그러해보였다. 머리가 하나씩 은빛으로 물들여 갈수록 서로를 챙기고 그리워하는 끈끈한 우정. 만나는 날이 다가 올수록 밤잠을 설치며 설레 임에 가슴 뛰던 그들의 우정이 새삼 고결해 보이고 따뜻함이 넘쳐난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밤을 밝히며 토해 내는 그들의 이야기 거리가 아내들에겐 지겨울 수도 있으련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온 삶의 동반자들임을 입증하듯 아내들도 같이 즐거워하고 애환에 젖는다. 이들이 갖는 만남의 의미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소중 한 것 같았다.

새벽 네 시가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이야기꽃은 멈추질 않았다. 남자들의 끈끈한 우정을 보며 내 마음도 뜨거워지고 있다. 이순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새벽 네 시가 훌쩍 넘었지만 이야기는 끝이 없다. 창문에 햇살이 비치도록 밤을 훤히 밝혔어도 피곤한 기색 없는 그들이 새삼 건장해 보인다. 이순을 바라보며 그들이 패기에 가득 찬 젊음으로 보이는 게 환상일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하얗게 밤을 새우며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아쉽다.

아쉬운 작별을 한다. 밤새도록 풀어내고도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남겨둔 채로. 다음 만남 때도 그들은 여전히 이십대의 청춘으로 돌아가 숱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짧은 밤을 밝히리라.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치던 남편처럼 이제 내가 가을을 기다릴 것 같다. 가을 속에서 순수한 청춘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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