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시리즈④]백제병원·남선창고·초량교회·168계단
김민부 전망대·유치환 우체통 등 볼거리 넘쳐

깜빡이는 교통신호등 초록불을 바라보며 부산역 맞은편 초량시장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산항의 바닷내음과 함께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구수한 냄새가 지나가자 향신료 향이 뒤를 따른다. 넉넉한 풍채를 자랑하는 러시아인, 가게를 기웃거리는 파란 눈의 외국인.

여기가 외국인지 부산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개항 1번지로 일본인들이 오갔던 초량동 일대에는 아직도 외국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초량 이바구길'은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종합병원인 옛 백제병원에서 시작한다. 색채가 화려한 모텔 건물 맞은편에 붉은 벽돌로 벽을 장식한 백제병원 건물이 서 있다. 백제병원은 1921년 8월 '백제의원'으로 개업했다. 백제병원은 당시 부산에서 벽돌로 지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였다.

일본 여성과 결혼한 뒤 장인의 눈에 들어 경비를 지원 받은 최용해씨가 병원을 세웠다고 한다.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으로 평가받은 백제병원은 시설이 가장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저명한 의사를 초빙해 인건비를 과다하게 지출한데다 병원 신축 때 빌려 쓴 사채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정난에 허덕이게 됐다.

갈수록 병원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은 문을 닫았다. 병원은 중국집으로, 다시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1972년 불이 나 건물 외부만 남고 내부는 모두 탔다. 이후 오래도록 방치됐다가 2012년 7월 부산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됐다.

건물을 빠져 나와 바로 뒤에 있는 '남선창고'로 향했다. '할인 행사'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나부끼는 대형마트 건물 옆에 낡은 벽돌 담벼락이 외딴 섬처럼 서 있다. 1900년 바다였던 초량이 매립되기 전 바닷가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의 흔적이다.

지금은 대형마트 주차장 한쪽에 남은 벽으로만 남선창고의 이바구를 들을 수 있다. 100여 년 동안 냉동창고 역할을 해왔던 남선창고는 2009년 붉은 벽채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선창고에서 이정표를 따라 초량중로 47번길에 들어선다. 벽과 벽으로 이뤄진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휘어지고 꺾어지는 골목을 오가다 보면 '담장 갤러리'를 만난다. 어린 젖먹이를 등에 업고 빨래를 하는 어머니, 익살스러운 표정의 동네 꼬마 등 흑백사진 속에서 왁자지껄했던 동네 골목길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부산의 산들은 19세기 말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6·25전쟁 때에 사람들에게 허리를 내어주고 삶의 터전이 돼 주었다. 개항기 때 바다와 가까운 매립지는 상업·공업, 항만시설이 자리를 잡았다. 가난한 부두 노동자들은 수풀이 우거진 산비탈에 집을 지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귀환동포, 피란민들도 먹고 살기 위해 산 중턱과 고지대까지 올라가 집을 지었다. 집이라고 해야 얇은 판자와 기름 먹인 마분지로 지은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비와 바람을 피할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1970년대까지 마땅한 급수시설이 없어 당시 초등학생들은 50~100원을 주고 물장수에게 물을 사서 산 아래 부산항까지 이고 날랐다. 골목의 공중화장실 앞은 아침이면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산시는 2011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으로 주거지가 정비됐고, 고지대의 역사, 문화 등 지역자원을 활용해 주민참여형 마을 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초량동 이바구길도 이 사업 중에 하나다.

초량초등학교에서 계속 걸어 올라가자 168계단이 나타났다. 아득할 정도로 높게 만들어진 계단의 끝은 이미 푸를 대로 푸르러진 가을 하늘에 닿고 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168계단의 중간 쯤에 '김민부 전망대'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민부 시인은 널리 알려진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했다. 2011년 3월 14일 그의 생일에 맞춰 산복도로 빈집 4채를 헐어 전망대가 만들어졌다. 모든 풍경의 지난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바구 공작소로 향한다.

이곳은 해방 때부터 한국전쟁, 월남 파병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녹아든 산복도로의 삶을 담고 있는 곳이다. 이바구 공작소에 앉아 가만히 산복도로의 삶에 귀를 기울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듯 마주보는 집들, 굽어진 골목을 놀이터 삼아 뛰어 노는 아이들, 어른들의 억세고 투박한 삶….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동네의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경남지역신문협의회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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