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로 기억된다. 우리집엔 아버지가 어디선가 가져다 놓은 여러권의 그림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 유독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림과 지도 그리고 글이 함께 있는 책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경자의'아프리카 기행 화문집'이란 화집이었다. 어린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지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는 벌거벗은 부족민들의 생활상이나 야생의 동물들 그리고 원시적인 풍습 같은 것들을 전해 주면서 갖가지 기획물로 우리에게 소개되어져 왔다. 그리고 아프리카 사람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사진들도 같은 인류임에도 별다른 배려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노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천경자의 이 화집에 나오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름답고 몽환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천경자 화백의 사진에서 풍기는 센 기운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교과서나 언론에 나오는 전시 소식을 접하면서 천화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백 중 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언제부턴가 전혀 노출이 되지 않아 그냥 나이가 많아 돌아가셨는가 보다 하고 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기지를 발휘해 일본으로 건너가 색이 섬세하고 예쁜 일본화를 배웠다. 당시 입체파나 야수파 같은 경향에 화가들이 몰두해 있었지만 어린시절 어머니와 장에 가서도 포목점에 놓인 예쁜 색의 옷감들에 정신줄을 놓을만큼 색채에 대한 감각이 타고나 있었다.

이런 천 화백의 작업을 해방을 맞은 우리 화단에서는 왜색풍이라 하여 반겨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에 이은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결혼의 실패로 천경자는 인생의 절망에 빠지고 만다. 이 즈음 광주역 근처 뱀집을 지나다 우연히 뱀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그녀는 매일같이 뱀탕집을 드나들며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출세작 '생태(1952)'였다.

이후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을 벗어나 문학적, 설화적 요소를 강조해 여인의 한과 꿈, 고독을 환상적인 색채의 화풍으로 묘사했다. 특히 세계일주를 하면서 제작한 여행풍물화는 천경자만의 그림 에세이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내가 봤던 화집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거였다. 1954년부터 20년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예술원 회원·국전운영위원·미술대전운영위원 등을 지내며 화단의 원로로 자리잡아 가던 중, 그 유명한 위작 사건이 터지고 만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애미가 지 새끼도 몰라보겠냐는 천화백에게 정신이 이상해져 자식도 몰라본다는 조롱이 돌아오자 천경자는 붓을 꺾고 미국으로 떠났다. 1998년 소장하고 있던 전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이후 2003년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는 그 어느 곳에도 노출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두문불출하여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예술원에서는 회원에게 주어지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8일 천화백의 장녀 이혜선씨가 "어머니가 향년 91세로 돌아가셨다"고 사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그것도 지난여름에 타계한 것을 시차를 두고 발표하자 이번엔 나머지 자녀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언니가 독점하고 있는 어머니의 안치 위치와 정확한 사망 경위에 대해 밝히라"는 다소 상식 밖의 모습들을 연출한 것이다.

위작문제와 관련해서도 다시금 본인이 위작행위를 했다는 사람을 조사했던 당시의 담당검사가 TV에 나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등 천경자 화백의 죽음 뒤에 남겨진 모습들이 가히 개운하지가 않다. 아무튼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선 추모행사가 진행된다 하니  그래도 우리는 한 위대한 예술가의 생몰에 관심을 가져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료를 찾아보니 천화백의 젊은 시절 사진부터 비교적 최근의 사진까지 병풍처럼 정돈이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늘 붙어 다니는 수식어처럼,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스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확신이 든다. 천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모든 여인의 모습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녀와 닮아 있었다.

먼 이국에서의 투병생활에서 그녀의 그림 속에 나오는 초점 없이 휑한 눈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지 않을까. 인연이 닿았다면 그토록 열심히 그려냈던 꽃 한송이 영전에 바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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