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집을 옮겨갈 때, 소박하게 실천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여름날 오후, 마당에서 아이들과 등목을 주거니 받거니 해 보는 거였다.

하지만 여름하면 떠오르는 오래된 추억들이 지금은 점점 무용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여름을 보내면서 돌이켜 보니, 집이나 직장 또는 쇼핑센터나 관공서 어디를 가도 더위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냉방이 잘 되어있고 심지어 이동 중에도 차 안의 에어컨은 계절을 잊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생활패턴이나 주거환경에 따라 여름을 느끼는 정도에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올 여름에도 일주일가량 열대야를 동반한 폭염이 있었지만 기상청의 발표를 보면 예년보다 특별히 더 더운 여름은 아니었다고 한다.

폭염이나 열대야로 불면의 밤을 보낸 사람들에겐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게 달라진 공기가 여간 반갑지 않을 텐데 불면증은 이렇게 기온 같은 물리적인 요인도 작용하지만 심리적인 병변적 요인이 훨씬 심각하다 할 것이다.

불면증은 잠을 못자서 힘든 것도 있지만 그 고통을 알기에 취침시간이 다가올 때 불면을 예상하고 느끼는 압박과 공포가 훨씬 고통스럽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의 대작곡가 바흐는 이런 불면으로 고통 받는 한 사람을 위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곡은 3백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명작으로 남아 많은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데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이 곡은 바흐의 주 무대였던 지금 독일의 라이프찌히와 드레스덴이 위치했던 작센 지방의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의 심한 만성불면증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카이저링크 백작은 별별 치료법으로도 불면증이 호전되지 않자 자신의 전속 쳄발로 연주자인 골드베르크에게 음악으로 불면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를 명했고 골드베르크는 자신의 스승인 바흐에게 백작의 뜻을 전해 불면치료곡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

바흐는 자신을 궁정음악가로 고용해 준 백작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정성을 다해 작곡에 몰두한 듯하다. 결과가 좋았던지 카이저링크 백작은 이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였고 '나의 변주곡'이라고 부르며 골드베르크에게 자주 연주를 주문했다고 한다. 한편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바흐에게 거금의 작곡료를 지불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1742년 바흐가 이 작품을 최초로 출판했을 때에는 '클라비어 연습곡집'의 4부로 출판했으며, 이때 곡의 제목은 '2단의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변주'라고 붙어 있었다. 표지의 어디에도 골드베르크나 카이저링크 백작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이후 골드베르크의 이름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잠과의 전쟁으로 고통받던 백작과 그의 곁에서 결코 짧지 않은 곡을 치료사의 마음으로 정성껏 연주하며 정을 나눈 공로가 아닌가 싶다.

이 곡은 반복 없이 50분, 그대로 연주하면 1시간 10분을 넘어서는 대곡이다. 건반악기로만 연주하는 곡으로는 유례가 없는 긴 시간의 곡이다. 그만큼 백작의 병이 깊어 고단위 처방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다.     

쳄발로·클라비어·하프시코드 같은 악기는 피아노의 할아버지 격쯤 되는 악기들이다. 살롱음악 같이 소규모 연주가 일반적이던 당시로선 소리가 작지만 담백하고 청아한 이런 악기들이 통용됐다. 악단의 편성과 공연장이 대형화 되면서 이런 악기들은 확성 역할을 하는 페달 같은 장치가 붙으면서 지금의 피아노로 진화돼 왔다. 그래서 요즘 피아노가 버터 발린 것처럼 느끼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 전 대관령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쳄발로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연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인은 꼭 이 곡을 쳄발로로 도전해 보고 싶었단다. 복잡하고 숨 막히는 세상에 들려주는 쳄발로의 쳉쳉거리는 울림은 아마도 피아니스트나 음악 애호가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건 사실인 듯하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크에 열광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얼마 전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슈투트가르트 쳄버오케스트라가 현악기로 편곡한 CD를 구입해 차에서 듣고 있다. 매우 단아하고 세련된 곡으로 수면 유도용 음악은 아닌 듯한데, 카이저링크 백작은 그저 옆에서 골드베르크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진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다. 음악과 사람으로 위안을 주고받는 가을맞이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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