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국 칼럼위원

▲ 석진국 거제공증사무소 변호사
1863년 1월1일 오후 2시 백악관 집무실. 링컨의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평생 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 일로 내 이름과 영혼이 역사에 길이 새겨질 텐데, 서명할 때 손이 떨리면 앞으로 이 서류를 본 사람들이 내가 주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 1일자로, 위와 같은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했다. 

링컨은 지방에서 수입도 변변치 않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변호사였다. 동료 변호사인 스탠턴은 "왜 저 긴팔원숭이를 끌어들였느냐"라며 공공연히 링컨을 무시했다. 1861년 대통령 당선 이후 링컨은 자신을 무시해온 정적 스탠턴을 반대를 무릅쓰고 전시에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링컨이 스탠턴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원칙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탠턴은 과연 링컨의 기대대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링컨 특유의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말해준다.

링컨은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았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문맹이었고, 목수와 농장 일꾼으로 일했는데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친 좋은 어머니였지만 링컨이 아홉 살 때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맞이한 새 어머니도 링컨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키우고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링컨은 꾸준히 책을 읽었고 스물두 살 때 집을 떠나 뱃사공, 가게 점원, 장사꾼,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으로 일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주경야독했다. 그는 나중에 젊은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책을 구해서 읽고 공부하게. 책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은 어디서나 다 똑같네.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겨두게."

"자치주의는 옳습니다. 이는 절대적이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 오랜 신념은 제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숱한 고난과 좌절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공부하려는 열정을 살려나가고 노예 해방이라는 신념을 펼쳐 나갔기에 링컨은 큰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우리의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무현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다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그 후 서울에서라면 충분히 당선될만했지만 영남 지역에서 출마하여 여러 번 좌절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지역주의 타파라는 신념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고 서민을 위해 정책을 펼쳐 나갔지만 사사건건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은 충분히 동정할 수 있지만 이에 동조할 수는 없다. 만일 잘못을  솔직하게 이를 인정하고 그 값을 치루고, 꿋꿋하게 살아남아 큰 역할을 하였다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남지 않았을까?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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