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詩人(자료: 거제향토문화사)

옛날 거제에 원님이 부임해 왔는데 성이 고(高)가였다. 사람들은 이름은 잘 모르고 창녕(昌寧)에서 왔다고 하여 고창녕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고창녕 원님은 명관으로 경남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거제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한 여자가 애지중지 여기던 달비를 잃어버렸다. 달비는 여자들이 자기 머리 위에 얹는 다른 머리채로 중부지방에서는 '가채'라고 부르지만 경상도 말로는 '달비'라고 부른다. 달비는 여자에게는 귀한 물건이었다.

달비를 잃어버린 여자는 며칠을 두고 고민하다가 새로 부임한 원님이 명판결로 유명하다는데 거기 말하면 찾아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원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달비를 찾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사건을 의뢰받은 원님은 달비가 여자에게만 쓰이는 물건이기 때문에 훔쳐간 자는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이방에게 마을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오늘 저녁 해가 지면 모두 동헌으로 모으라고 명령했다.

원님의 명이라 모든 여자들은 저녁이 되자 동헌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원님은 잃어버린 달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돌아가는 얘기며 예의와 도덕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이며 도둑질한 자에게 내리는 엄한 벌도 설명했다.

마을 여자들은 이미 소문을 통해 누군가가 달비를 잃어버렸고, 오늘 동헌에 모이는 것은 훔친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원님은 달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여자들 중에는 정작 달비를 훔친 여자도 함께 있었다. 이 여자는 올 때부터 가슴이 졸여 있었다.

원님은 "자, 이제 내가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원님이 달비를 찾느라고 닦달질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냥 가라하니 어리둥절 했지만 모두 대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원님은

"달비를 훔친 여자는 게 섯거라."

하며 여자들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달비를 훔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소리에 개의치 않고 대문 밖으로 나가기 바빴는데 정작 달비를 훔친 여자는 제 발에 저려 쭈삣쭈삣 하며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원님의 지혜로 달비를 훔친 범인을 잡게 됐다.

Tip
경상남도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고창녕(1722년 경종2년∼1779 정조3) 이야기는 널리 구전되는 설화이다. 시골 노인들은 대개 성만 알고 이름도 모른 채 고씨(高氏)가 창녕 고을 원님을 지냈다고 하여 '고창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그 지역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고을 원님으로 있었다고 믿는 경우까지 있었다. 성은 고(高)이며 이름은 유(裕)로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순지(順之), 호는 추담(秋潭). 상주출신의 학자이며 명관으로 창녕 현집으로 와서 정사를 잘 다스려 고창녕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창녕현감·안주목사(安州收使)·경상도사(慶尙都使) 등 외직을 거친 뒤 내직에 들어와 승정원 부승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1741년(영조17) 생원이 됐고, 다음해 성균관유생들에게 보인 친시(親試) 제술과에서 수석으로 급제해 인재로 주목받았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토지·소송문제 등을 잘 처리했다. 1796년 청백리에 녹선 됐다. 문헌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설화는 <기문총화(記聞叢話)><동야휘집(東野彙集)>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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