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詩人(자료: 거제향토문화사)

비단을 팔러 다니는 장수가 있었다.

당시에 비단은 매우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탐을 내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다 보면 늦은 밤에 산길을 헤매야 할 때도 많았다.

그날도 비단장수는 등짐을 지고 팔려 다니다가 늦어 버렸다. 산을 넘어야 주막으로 갈 수 있는데 그 산에는 종종 도둑이 나타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을 빼앗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비단장수는 빨리 걸으면 산 하나쯤 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른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산을 넘고 있었는데

"꼼짝 마!"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둑이 턱 버티고 서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비단장수는 도둑을 보자 하늘이 하얘지면서 오금이 저려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지고 있는 물건 내려놓고 빨리 가."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고 있던 비단을 내려놓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비단장수는 이렇게 쉽게 비단을 빼앗기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도둑이 무서워 정신 줄을 놓고 있었지만 이제는 무서운 것보다는 비단이 아깝다는 생각이 앞섰다. 비단장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도망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도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도둑은 값싼 방물인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비싼 비단을 한 짐이나 빼앗았으니 기분이 여간 좋지 않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보시오."

갑자기 비단 주인이 나타나자 도둑은 깜짝 놀라 옆에 둔 칼을 움켜쥐며

"이놈이 죽고 싶어서 제 발로 찾아온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 내 말을 들어 보소. 내가 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으느라 댕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빼앗긴 물건을 도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장사도 끝이고 하니 이제 마지막으로 댕기나 할 수 있도록 비단 한 감만 베어 주소."

비단장수가 하는 말이 과히 틀린 말도 아니고 물건을 빼앗긴 비단장수의 마음을 헤아려 도둑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는 큰 칼로 비단을 자르려고 했다.

"그런 칼로 베면 비단이 못쓰게 되오. 비단은 비단을 자르는 칼로 잘라야 하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꼭 댕기를 하고 싶었던 색깔을 고르게 해 주시오."

뭐 그 정도야 어려울 게 있느냐는 듯 도둑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비단장수는 한 짐이나 되는 비단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비단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 없어 빨리 해."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도둑이 다가와 재촉했다. 그때 비단장수는 비단을 자르는 척 하다가 도둑의 눈을 쑤셔버렸다. 피할 틈도 없이 기습을 당한 도둑은 한 쪽 눈을 움켜쥐고 뒹굴기 시작했다. 비단장수는 얼른 비단을 챙겨 지고 달아나 버렸다.

비단장수는 첫 번째 있는 주막은 들르지 않고 두 번째 주막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두 번째 주막은 관가와 가깝기 때문에 도둑이 거기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눈이 찔린 도둑은 비단장수를 잡으려고 뒤를 쫓았다. 틀림없이 주막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주막에 오니 비단장수는 없었다. 만약 비단장수가 첫 번째 주막에 들렀더라면 틀림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비단장수의 기지가 비단도 잃지 않고 목숨도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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