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다가오는 주말에 직원들이랑 제주도에 워크숍을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한국문예회관연합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해비치아트페스티벌과 연계해 전체 직원이 전원 참석하는 행사로 연초부터 계획돼 있었던 것이다. 이왕 간 김에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와 서귀포예술의 전당과의 간담회를 통해 생산적인 협의도 함께 진행하려 했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해비치아트페스티벌이 메르스사태로 무기 연기됐다는 전갈이 왔다. 당장 우리도 워크숍을 계속 추진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결론을 내어야 한다. 직원들은 가족들이 불안해한다며 가기를 주저하는 눈치다.

사실은 지난 주말 이런 수순으로 분위기가 전개되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이 되기도 했다. 벌써 수도권에선 각종 공연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공연장이나 회의장 행사가 원만히 진행될 리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사스 때문에 세계합창제를 개막하자마자 취소했던 황당하고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 예산 손실이 거의 백억원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종플루나 조류독감 등이 기승을 부릴 때면 관련 산업만 죽을 쑤는 게 아니라 문화예술계도 초토화된다고 보면 된다.

공연예술계의 계약방식은 천재지변에 의한 공연취소시 발생시점을 기준으로 계약당사자 상호간에 기왕 집행된 행정적, 금전적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거나 반환을 요구할 수 없고 그대로 종결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각종 전염병들이 창궐하면 이것을 천재지변으로 보느냐 마느냐를 두고도 간혹 법적 다툼이 있게 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소위 '전염병'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등장하곤 했다. 도저히 극복이 되지 않을 것 같던 이런 질병들이 백신의 개발로 역사 속 유물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메르스사태처럼 마땅한 대응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경우도 많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은 페스트(흑사병)일 것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서너가지 유형이 있지만, 살덩이가 썩어 검게 변해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 불린다. 메르스가 낙타로부터 원인이 되듯이 페스트는 들쥐나 다람쥐 또는 쥐벼룩에 의해 인간에게 감염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페스트는 1347년 크림공화국 페오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한 몽골군이 페스트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실어 성벽 너머로 내어 던지면서 일종의 생화학무기화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페오도시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문호 보카치오는 그의 소설 '데카메론(1349-1351)'에서 페스트의 증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서 이 병은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종기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것은 사과만큼 커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계란 정도인데 이는 '가보치올로'라 불렸다. 이 가보치올로는 곧 증식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데카메론의 표제는 '데카 헤메라이(deka hemerai)' 즉 열흘을 의미한다. 페스트가 퍼진 피렌체를 피해 피에솔레의 시골별장으로 온 열 명의 남녀가 각기 매일 한 가지씩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으로 모두 100편의 액자 속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당시로선 다소 파격적인 남녀간의 선정적 소재도 다루어지고 사회 풍자적인 요소들이 함축돼 있다. 무엇보다 흑사병의 공포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돼 있는 것이 특이할 점이다. 

페스트는 이미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몰락에도 일조를 한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창궐하며 지역에 따라선 절반 이상의 인구를 감소시키며 노동계급의 붕괴와 지주의 몰락 그리고 산업구조의 재편을 가져 왔다. 이런 상흔으로 인해  '치명적인', '전염병의'라는 뜻의 영어 'pestilent'가 지금도 쓰이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메르스는 또 다른 양상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건강한 사람에겐 치명적이지않다는 설명이 그나마 위안이 될 뿐 이번에도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이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데카메론'에서도 성직자를 비롯한 당시 지도층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이 여기 저기 등장하고 급기야 현실에서 그들의 지배구조는 붕괴되고 만다. '신데카메론'이라 할 수 있는 SNS 상의 의견들을 단속만 하려하지 말고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잘 들어 보는 것이 우선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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