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신다. 어느날 헌금함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그 중에 두 렙돈을 넣은 한 가난한 과부를 일컬어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평가하셨다.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사무엘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장자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감탄하는 사무엘을 향하여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육체를 자랑할 때가 많다. 학벌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자랑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육체를 따라 판단할 때가 많다. 사도 바울은 전에는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다고 고백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었는데,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사형 당한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로 사시던 분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가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우리가 이제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을 육체대로만 알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기회를 놓쳤던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 지혜와 능력에 놀라면서도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하고 예수님을 배척했다.

성경은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한다. 야고보서는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우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에 얼굴 생김새나 직장을 보고, 또는 옷차림을 보고 평가해 본 적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사람은 얼굴이 예쁜 사람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도 아니다.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찾으시는 사람은 중심이 뜨거운 사람이다.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는 사람이다.

교회의 힘은 여기에 있다. 그 중심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사람이 많을 때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노래하고 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달라져야 하겠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셨다.

우리가 정말 귀하게 봐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방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었던 어리석은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그 주인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육체를 자랑하기 이전에 성령의 사람되기를 기도하자. 육체로 알기 이전에 중심에 관심을 갖도록 하자.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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