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는 중국 하남성 출신의 거상(巨商)이다. 전국책(戰國策)에 여불위가 거상이 될 수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여불위가 그의 아버지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이익이 납니까?" "열 배" "주옥을 팔면 얼마나 이익이 남습니까?" "백 배" "그럼, 왕을 내편으로 만들면 얼마나 벌 수 있습니까?" "그건 셈을 할 수가 없지"

여불위가 조(趙)나라에 갔을 때 거기서 자초(子楚)를 만난다. 자초는 진(秦)나라 공자로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다. 총명한 상인 여불위는 자초에게 자신의 재물을 걸고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다. 여불위의 경제적 후원으로 자초는 여러 제후와 대부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원을 매수해 자초를 고국으로 빼돌렸고, 마침 진왕에게 아들이 없는 점을 노려 왕후에게 많은 예물로 가까이 한 뒤 자초를 태자로 삼는데 성공한다.

훗날 자초가 진의 장양왕(莊襄王)이 되자 여불위는 승상(丞相)으로 임명되고, 곧 바로 문신후(文信侯)로 봉해져, 낙양(洛陽)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받게 된다. 장사꾼 여불위의 셈법대로 가장 많은 이문을 남긴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애첩 조희(趙姬)를 자초가 좋아하자 임신한 채로 넘겨주었는데 거기서 난 아들이 바로 진시황(秦始皇) 정(政)이다.

여불위가 3천명의 학자를 모아 집대성한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진나라 통일제국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그러나 진시황의 친정(親政)으로 최고 권력은 나누어가질 수 없다는 속성에 따라 중부(仲父)로 국사를 좌지우지했던 여불위의 권력은 회수 당한다. 표면적으로는 궁중 추문이 빌미가 되지만 절대 권력을 위해 진시황이 여불위의 정치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드디어 여불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그는 끝내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택하고 만다.

나라를 온통 흔들어 놓은 성완종 사건도 기업인이 정치와 결탁하여 더 많은 이문을 남기려했던 잘못된 셈법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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