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은혜 계룡수필문학회원

고추잠자리가 비행한다. 저녁 무렵, 한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가 하늘을 휘젓고 다닌다. 여름이 가는 길목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추잠자리 떼. 한참을 놀다가 지치면 나뭇가지에도, 빨랫줄에도 앉아 쉬기도 한다.

언제나 빨랫줄은 넉넉한 마음이다. 누가 찾아오든 마다하지 않고 받아준다. 참새들도 찾아와 담소하며 즐긴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찾아와 심술을 부려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준다.

장난꾸러기 참새는 차분히 앉아 이야기하지 않고 날갯짓을 하며, 폴짝폴짝 뜀뛰기도 한다. 움직일 때마다 빨랫줄은 출렁이는 제 몸을 추슬러 고요를 되찾으려 안간힘이다. 그러나 참새들은 이런 배려에는 무관심이다. 아랑곳 하지 않고 서로의 주둥이를 마주하며 조잘댄다.

마당을 가로질러 있는 빨랫줄은 이쪽과 저쪽을 길게 이어준다. 줄에는 온갖 옷들이 목욕을 하고나와 제 몸을 뽐내고 있다. 크고, 작고, 희고, 검고, 구분이 없이 모두 나와 있다. 옷들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러는 덩치 큰 이불도 나오고, 앙증스런 소녀의 손수건도 등장한다.

그리고는 한껏 햇볕을 향해 제 모습을 드러내려 안간힘이다. 가끔 바람이라도 지나가면 열광이다. 너울거리며 춤도 추고, 심하게는 그런 행동이 지나쳐서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난 집을 지으면 빨랫줄을 꼭 갖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는 어린 날 바라보던 그것이 늘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언젠가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마당이 넓은 전원에 살게 되면 반드시 가지리라는 다짐도 여러 번 했었다. 남들은 별의별 것을 다 갖고 싶어 한다며 유별나다 할지 모르나, 빨랫줄에는 어린 날을 추억하게 하는 사연들이 많다. 빨랫줄이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듯 나와 할머니를 연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구들의 옷가지를 앞 냇가에 가서 헹구어 오면 할머니는 툭툭 털어 빨랫줄에 걸으셨다. 할머니께서 건사해야 할 식솔이 많듯 빨랫줄에는 온갖 것들이 다 내걸렸다. 주로 낮에는 말려야 할 것들을 널었지만, 밤에는 바구니들도 매달렸다.

먹고 남은 보리밥 덩어리가 담긴 바구니. 오랜만에 사온 생선이 담긴 바구니. 상할 것 같은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장소가 역시 빨랫줄이었다. 이곳에는 쥐나 고양이의 약탈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할머니의 사랑은 바지랑대가 으뜸이다. 부모 없이 혼자인 내게 할머니는 수호신이었다. 더러 친구들이 나를 놀리거나 못 견디게 하면 당신의 키 두세 배가 되는 바지랑대를 들고 나타나 휘들을 듯 표정을 지으시면 모두 줄행랑을 놓고 만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나는 가끔 속없는 짓을 한 것 같다. 이불 호청을 빨아 널어놓으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며 숨바꼭질도 하고 놀았다.

덜 마른 호청 깃의 찬 느낌도 마냥 좋았다. 아랫도리가 다 드러나도 널어놓은 빨래 속에 얼굴만 가리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진함. 그곳에 내 어린 날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집을 지어 이사하고도 빨랫줄에 대한 소망을 말하지 못 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분주한 남편에게 입을 연 것은 이사를 하고도 한참 후였다. 남편은 이리저리 궁리 끝에 뒷마당 가장자리에 줄을 매어 주었다.

이제 바지랑대만 있으면 되겠다 싶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바지랑대를 만들겠다고 큼지막한 대나무를 메고 울안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보고 달려가 거들어 본다. 남편은 힘에 겨운지 얼굴이 온통 붉다. 땀이 범벅이다. 긴 대나무 바지랑대를 두개나 안겨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감격해 한 뜻을 남편은 몰랐을 것이다. 할머니가 내 친구들 앞에서 으름장을 놓았던 바지랑대. 알밤이든 대추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치켜세우고 털어대던 할머니의 바지랑대.

이젠 빨래가 널린 줄을 바지랑대로 추켜세워 놓고 하늘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 날을 추억하면 된다. 

비가 온다. 빨랫줄엔 아무것도 널려 있지 않다. 비행하다 지친 잠자리도 없고, 참새도 없다.
쏟아지는 비가 줄에 부딪친다. 튕겨져 흩어진다. 남아 있는 빗물이 모여 방울을 만들고 매달려 있다. 유리알 같이 투명한 물방울. 그것이 보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둘 따다가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어 할머니처럼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내 허망을 알고 있는지, 심술궂은 바람이 휙 스치고 지나간다.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며 환상에서 깨어나라 소리친다.   

비가 개면 집안의 빨래들을 모아서 줄 가득히 널어야겠다. 무겁다고 늘어뜨리면 바지랑대를 걸어 어깨를 받쳐 주어야지. 하늘 높이 올려진 빨래들은 창공에 나부끼며 펄럭이겠지. 바지랑대 끝에 사뿐히 내려앉은 고추잠자리는 머리를 사방으로 돌리며 주위를 살필 거야.

그러면 사방을 둘러보는 나에게 할머니의 사랑이 빨랫줄을 타고 가슴으로 스며들겠지. 
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또 내린다.  오늘도 빨랫줄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송알송알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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