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희 - 계룡수필 회원

사진을 본다. 영락없는 할망구다.

‘에그 입이나 다물고 웃을 것이지’ 속임수 없이 드러내는 정직성이 오히려 밉살맞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데 사진이 실상을 보여주며 경종을 울린다. 한쪽 어금니가 모두 빠졌다. 그리 된지 오래지만 게이지 않고 지냈다. 입 벌린 모습을 스스로는 볼 수도 없고 한쪽으로 잘 씹고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태평스러운 내가 답답해서 가까운 이들이 성화를 댄다. 봐 줄 수가 없다 아우성이다. 이를 심으라고들 한다. 아니 틀니라도 하라 한다. 나는 시큰둥하다. 기다리면 될 일이다. 몇 개 남은 것들이 다 빠져버리면 그때 가서 조치할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나고 말았다. 이 하나가 깨어져 음식을 먹기 곤란해졌다. 비상사태 발생이다. 하도 아파서 며칠 동안 아예 단식을 해버렸다. 먹이를 먹지 못하며 사는 동물은 없다. 끝이 나고 만다. 엄연한 자연 법칙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가 빠져도 잘 살아가지 않는가. 대체 이로 말이다. 대용 이 만드는 기술은 날로 발전하여 심기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주사로도 먹이를 먹는다.

인간을 자연으로 보면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이치에 맞는다. 음식을 스스로 씹어 먹을 수 없는데 어찌 살아 낸단 말인가.  결국 이가 빠지고서도 생명을 이어 가는 것은 순리를 역행하는 억지만 같다. 인간만이 수명까지 욕심을 낸다. 사람임이 가끔은 부끄럽다.

인도 사막에서 보았던 낙타 주검이 떠오른다. 살덩이는 이미 흔적도 없고 거무스름하게 변해버린 뼈만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수명대로 살다가 때 되어 홀로죽음을 맞고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양이 자유로워 보였다. 아니 경건하기까지 했다. 뼈까지 흙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아득하게 여겨졌다. 어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합장하며 기원했다.

그런데 이빨은 온전히 그대로였다. 썩지도 못한 모양이 처연했다. 죽어서도 이빨이 멀쩡했는데 산 인간의 이가 빠지다니. 틀니다 임프란트다 요란을 떨면서 살아가는 내가 더 미물이다.  물리적인 수명을 다하고도 당연한 듯 죽음은 남의 것이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타인에게도 자연에게도 빚을 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것이 다했으니 남의 몫을 빌어 살고 있음이다. 자연을 축내고 있음이다.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삶에 대한 집착으로 바뀔까 두렵다. 억지로 더 받아낸 수명. 어찌 살아야 반듯할까.

들짐승처럼 살고 싶다면 욕이 되려나. 목숨 이어 갈 만큼만 먹이를 스스로 구해야지. 너른 들판을 자유롭게 노니다가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음을 맞아야지.

그리고 있다간 흔적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랄까. 이 하찮은 소망하나 이루지 못하며 사는 내가 가엷다. 욕망으로 뭉쳐진 인간임을 벗어 던지면 혹여 가능할까. 벗들이여 우리 모두 사람의 탈을 벗어 던져보자. 짐승으로 자유롭게 살아보자. 그리고 죽어보자.

사진속의 할망구가 돌아  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해벌죽 웃고 있다. 이제 틀니를 끼고 태연하게 사진을 다시 찍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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