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인간의 삶은 탄생과 죽음으로 시종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의지로 생몰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누구 한사람 본인의 탄생을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이제 허다히 선택의 영역에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지난 주 국내에선 드물게 총기사고가 잇달은 바 있다. 죽음의 방법이 총기인 것이 아직은 생경한 게 우리의 현실이지만 일각에선 이런 종류의 사건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경고를 주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재산문제로 70대 노인이 80대 형님부부를 조준사격해서 죽이고 출동한 경찰관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장면에선, 이제 우리사회에서 노인은 인생을 관조하고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현실적 탐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과거의 노인상이 아니다.

이 사건이 좀 더 주목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분노조절 장애가 고령의 가해자에게 발동했다는 것이고 유서까지 작성해 놓은 걸로 봐서는 결코 우발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재산문제로 시작됐을 가족간의 갈등이 치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됐고 종국에는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본인의 삶도 총이라는 일정한 간격을 둘 수밖에 없는 도구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숨은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살론'이란 저서로 유명한 에멜뒤르켐은 "모든 자살은 결국 타살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관심을 끌며 삶의 마지막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장식한다는 것인데, 자살에 이성이 부여되는 시점, 즉 자살을 하는 시점은 불완전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자신의 능력을 양보하는 시점이고 그 행위인 '자살'을 수반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이라는 결론에 닿아야만 가능하다는 다소 변증법적 논리였던 것 같다. 뒤르켐은 자살을 내부에서 무시해온 하나의 관찰을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인간의 무의식으로 여긴다.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전위적인 예술가였던 데랴야마 수우시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자살학 입문'을 역설한다. 그는 자살예찬가로 유명한데 소년시절 자신이 자살기계에 푹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음을 한탄하며 자신의 연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는 복선의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지만 혼자서는 죽을 수 있다고.

예술가 중에도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시절 의붓오빠로부터 받은 성폭행의 상흔으로 평생을 정신쇠약으로 고생하며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급기야 그녀는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화가 반 고흐는 권총자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사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소설가인 스티븐 네이페와 작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수많은 고흐의 편지를 분석한 끝에 쓴 책 속에서 고흐가 프랑스 근교 농촌에서 소년 2명에 의해 살해됐다는 가설을 전개하고 있다. 당시 고흐는 마을에 살던 두 소년과 친분이 있었는데 사건 당일 보리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불량 총을 가지고 놀던 두 소년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았다는 것이다.

총상을 입은 고흐는 고통으로 느끼면서도 이 소년들의 미래를 생각해 스스로 자살을 가장하기로 하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사건 전날 고흐는 평소보다 많은 물감을 주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니 사실이라면 적어도 전날까지 자살할 의지는 없었다는 것이 된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권총자살을 했는데 그의 가족력을 보면 아버지를 비롯해 손녀까지 줄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울증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이면에는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국내 어느 비뇨기과 홍보물에 보면 헤밍웨이는 음경왜소증과 발기부전으로 자살했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상황을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생전에 네 번의 결혼을 한 헤밍웨이에게 너무 자존심 상하는 분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웰빙에 이어 웰다이가 관심의 대상이 된지도 꽤 오래 되었다. 이젠 죽음에 대한 나름의 문화를 형성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편으론 '또 하나의 죽음'이라 불리는 자살 문제에 훨씬 심도 깊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죽음이 가벼이 여겨지는 사회, 내 생명을 쉽게 내치는 사회에서 타인의 존중이나 배려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생명부터 소중히 여기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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