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봉 칼럼위원

▲ 문철봉 통영YMCA 사무총장
어머니의 뒤를 따라 나선다. 읍내 방앗간엔 사람들로 북적하고 김이 서린 곳에선 구수한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오신 함지를 줄로 이어진 다른 함지들 끝에 내려놓으신다. 그리곤 눈짓 한 번 주시고는 잰걸음으로 난전엘 가신다. 아이는 당연히 제집 함지 곁을 지켜 선다. 줄어드는 차례를 놓치지 않고 함지를 들이민다. 한참의 시간과 순서를 기다리는 지겨움보다 막 만들어져 나오는 따뜻하고 몰캉한 가래떡을 한입 베어 먹을 수 있는 기대가 더 컸던 설 며칠 전의 대목일감이다.

이때는 이발소에서도 차례를 기다려 머리를 깎고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한다. 새 옷을 입기 위한, 추석과 설 때면 꼭 해야 하는 절차와도 같은 일이다. 이렇게 설을 맞는 준비의 끝 꼬리가 섣달 그믐날이다. 장작을 나르고 마당과 골목을 빗질하는데 까치가 운다. 까치설이란다. 출가했던 삼촌들이 오고 타지에서 공부하던 형 누나들이 온다. 까치가 동구나무 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분주히 옮겨 앉으며 우는 까닭이다.

이 밤엔, 섣달의 그믐날 밤엔 아이는 잠들고 싶지 않다. 이날 밤에만 나타나 신발을 훔쳐간다는 밤불귀신(야광귀) 얘기가 무섭기도 하고 이 밤 자정을 지키지 못하면 눈썹이 센다는 말이 겁나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누나가 떡을 썰며 도란도란하는 얘기가 더 듣고 싶고  누나가 설 선물로 사다준 털장갑을 끼고 자랑하고픈 설렘에 잠들기가 싫어서이다. 안간힘을 쓰지만 아이는 잠이 들고 어른의 일은 밤을 넘긴다.

잠에서 깨어 그대로인 눈썹에 안도하며 신나게 세수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던 아침, 아이의 들뜸과 설렘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정숙하고 정갈하게 맞던 어른들, 언제 저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고 큰방과 대청마루를 다 치웠나 싶은 놀라움이 저절로 엄숙함으로 바뀌던 아침,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활짝 열린 방문 안 방석위에 정좌하신 어른을 향해 큰절 드리면 공부 잘하라며 손짓하실 때 조심스레 들어가 공손히 받던 세뱃돈, 이 아침이 설이다. 우리 아이일적의 설 쇠기이다. 이러한 설 세배는 보름까지 이어졌던 기억이 있다. 외가까지 100리도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도 흰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걷던 아버지와 아제들의 모습이, 그렇게 흰 도포로 줄을 지어 논두렁길을 가로질러가던 다른 행렬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 설은 구정(舊正)이라 명절로 쇠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을 했다. 양력을 쓰고 있으니 신정(新正)을 설이라 해야 한다 했다. 그랬다, 우리 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는 이중과세(二重過歲)는 옳지 않은 것이라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어느 사이엔가 설이 시큰둥해졌다.

그렇다고 신정(新正)을 설로 쇠는 집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그러셨다. "왜정도 아닌데 와 그라는지 모르겠다"며 "설은 우리 설 쇠지 왜놈 설을 쇨까?"하셨고 그전 같지는 않지만 설빔과 음식들을 장만하셨다. 몇몇은 신정(新正)에 세배를 왔지만 우리는 음력설을 찾아 세배를 드렸다. 이전처럼 문중 일가와 외가까지 일일이 찾아 세배 드리지 않고 제 집안과 꼭 해야 할 때만 가려서 드렸다.

지금은 저 어렸을 적 추억 같은, 설레고 엄숙하던 설을 쇠려야 쇨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력의 설을 우리 설이 아니라고 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세태는 너무나 달라졌다. 우리 모두가 찾아다니며 나누던 설 인사를 대신하여 전화문자와 카톡으로 오만가지의 카드와 동영상을 보낸다.

이렇게 지금의 설 쇠기는 오로지 손바닥 안에 있는 듯하다. 극대화된 문명의 편리함이다. 헌데도 저 어린 시절의 설 쇠기가, 엄동설한보다 더 독했을 왜정치하를 견뎌내며 진정 우리 설을 쇠셨던 어른들이 무시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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