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언젠가 들렀던 프라하의 어느 골목에서 프라하가 가진 낭만성과는 사뭇 이질적인 장면을 목격했던 기억이 있다. 죄인을 처형하는 각종 기구들을 소개하는 일종의 전시회였는데, 관람 이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토록 기발하고 적극적인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해 한동안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요즘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세계인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처형 관련 뉴스를 접하며 다시 한 번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악마성 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터키에서 실종되었다는 한국인 18세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하고 IS가 무슨 상관일까하고 아주 먼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했던 이슬람권 문화와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해 IS에 합류하기 위해 시리아로 떠난 오스트리아 10대 소녀 2명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보스니아 이주자 가정 출신의 친구 사이로 알려진 두 소녀는 각자 부모 앞으로 "우리를 찾지 마세요. 우리는 알라를 섬기며, 그를 위해 죽을 거예요"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소녀들이 시리아를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고 IS에 합류하지만 실제론 남성 중심적인 IS 점령지에서 여성들이 강간과 학대를 당하거나 노예로 팔리고 있는 현실에 실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실제로 '나쁜 장소' 즉, 디스토피아(dystopia)였던 것은 아닐까.

어느 시대이든 이상국가나 이상사회를 꿈꾸지 않았을 리 없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엄밀히 말해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이후 많은 유토피아류 소설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A.L.헉슬리는 '멋진 신세계(1932)'라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이상향에 대한 여러 가지 조합들을 섬세하게 미래시제로 그려내고 있다. '1984년'(1949)의 작가 조지 오웰의 이튼스쿨에서의 프랑스어 선생님이기도 했던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미래세계의 공간을 빌어 1920년대의 전체주의, 소비주의, 몰인간화를 냉소하며 신세계의 모델을 보여주려 했다. 물론 그가 그린 신세계는 결코 멋진 곳이 못되고 말았지만. 

2002년, '멋진 신세계'와 '1984년'을 적당히 버무려 만든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은 디스토피아(dystopia)류 소설을 설익은 채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세간의 비난을 받아왔지만 '베트맨 비긴즈'의 잘 생긴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액션신을 펼치며 자칫 어렵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오락거리로 만들어 내고 있다. 하물며 이전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피앤딩의 마무리까지.

'멋진 신세계'의 소마(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먹는 약)와 '1984년'의 감시체계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은 이전 세계의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약물의 투입으로 인간들은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균형, 평온의 상태 즉, 영화의 제목처럼 이퀼리브리엄의 상태가 되는데, 인간이 가지는 감정의 부산물로 대표되는 사랑, 종교, 예술 등은 그들이 척결해야 할 요소로 당연히 그들의 지도자로부터 세뇌당한 금지품목이다.

영화에서는 반란군의 무리들이 이런 감정 없는 평온상태를 거부하고 저항하다 죽어간다. 그러나 이런 감정 있는 이들을 소탕하러간 감정 없는 또는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세뇌되어진 주인공은 예츠의 시집을 발견한 후 고민한다. 이후 약물을 거부하고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들려오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의 1악장은 아내가 눈앞에서 죽어갈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내게 만드는 반전을 이끌어 낸다. 이 영화에서 예츠의 시집이나 베토벤의 교향곡이 가지는 도구로써의 기능이 다소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잠시 영화의 흐름에 동의하게 만드는 마력도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각종 이념에 지쳐 있다. 전쟁이나 범죄가 감정 과잉에서 기인한다고 감정을 없애는 약물을 투입한다거나 한 사람의 이성에게 집착하는 것도 감정과잉이라 여겨 집단섹스로 감정을 배분한다거나 하는 기발한 발상도 어차피 새로운 이념이다. 복지니 증세니 하는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모든 사안들 뒤에도 이념은 공공연히 또는 숨어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 사랑이라는 이념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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