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규 경남PEN문학회장

▲ 이창규 경남PEN문학회장
여름이 무르익는 통영바다와 거제바다를 바라보며 푸르른 녹음 속을 달리던 자동차는 어느새 거제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전쟁문학의 모태가 된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중심으로 특징적인 이순신의 승전지 옥포해전과 기념관, 그리고 세계 제일의 조선소, 바다와 하늘을 가로질러 달리는 아시아 제일의 거가대교,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해금강, 거제의 민속·문화·예술과 교육을 집약해서 담아 놓은 거제민속관, 거제자연예술랜드, 동양의 하와이라는 외도 등으로도 아름다운 거제의 자연경관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섬이다.

무엇보다 거제가 포로수용소로 하여금 전쟁문학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제가 전쟁문학의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왜구의 침략에 시달린 곳이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약 18만에 가까운 포로들을 수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그동안 남아 있던 수용소의 잔존 건물들을 유적공원으로 조성해 전쟁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전쟁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 놓고 있는 유명한 곳이었다.

거제도가 모섬으로서 따뜻한 섬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군대를 실어야하는 군함에 군인이 아닌 수많은 피난 민간인들을 실어 거제도에 피난시킨 생명존중의 정신과 10만이 넘는 많은 피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 거제도민의 온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해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72발을 장전할 수 있다는 따발총 앞에 우리 가족이 끌려나와 가장인 아버지를 찾아내라는 협박은 죽음뿐일 것 같았다. 10m 앞쪽에서 아버지의 행방을 말하라는 독촉과 협박에 말할 수 없어서 말이 없자, 1m 앞쪽에 따발총으로 서너 발을 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 총구가 조금만 윗쪽으로 들렸어도 우리 가족은 한 명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아찔한 순간을 목격했다. 그런 공산군의 만행을 포로수용소에서 재현해 보는 것 같았다.

이웃집에서는 친구 아버지가 공산군에게 끌려갔는데, 지금도 소식이 없어 제사만 모신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다음 날 끌려 간 뒷산 쪽으로 따라가 본 가족들은 친구 아버지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어 주워다 모셔놓고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아버지를 기다렸다가 고무신을 넣은 빈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이곳에서 생각났다.

포로수용소에서 만나는 공산군들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을 도강하려고 대기하면서 시끄럽게 우는 젖먹이 아기들을 강으로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 저녁 모임에 그런 아이를 장작불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 어른들이나 청년들이 짚 무더기 속에 숨었다가 총살로 죽었거나 관통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다반사로 들을 수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동리 뒷동산은 공비들로 인하여 전쟁터가 된 것 같았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전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어릴적 나의 기억과 겹쳐 의미롭게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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