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11월 3일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20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이승과 작별을 고한 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에 맞추어 통영에서는 매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라는 행사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는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예술가의 삶이란 게 이승을 떠나는 순간 잊혀 지기 십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콩쿠르는 한 음악가를 지속가능하게 기릴수 있는 최적의 장치이다. 콩쿠르에 참여하라고 알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이름이 홍보되며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당 음악가와 관련된, 이를테면 작곡가의 경우 그의 작품을 열심히 연습하고 연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칫 죽음과 동시에 사장될 수 있는 예술가의 작품이나 예술적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는 의미에서 콩쿠르는 참여자에게는 피를 말리는 경연의 장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활동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국격을 나타내거나 국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역할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글로벌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다지 많은 글로벌한 예술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수준의 공연단체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서울시향이 유럽투어를 한다거나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레코딩을 했다거나 하는것이 뉴스가 되겠는가.

윤이상과 백남준은 이런 척박한 대한민국의 예술계에 몇 안되는 글로벌한 인물이다. 이들의 인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1958년 여름,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는 현대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조직위에서는 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하계강습회에 참가 신청한 사람들 중 같은 국적인 윤이상과 백남준을 한 방에 배정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열흘 남짓 룸메이트가 된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조국에 대한 이야기까지. 15살 나이가 많은 윤이상은 그의 아내 이수자에게 한국에서 온 청년과 같은 방을 쓰는데 이 친구가 아주 총명하고 천재끼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봤던 듯. 두 사람의 인연은 이듬해인 1959년에도 이어지는데, 다름슈타트현대음악제로부터 공식초청을 받은 윤이상이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라는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반면 백남준은 작곡가로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는 20세기 현대음악의 역사를 새로 쓴 존 케이지가 함께 했다. 윤이상의 표현을 빌자면 "여기 모인 전위음악의 쟁쟁한 투사들도 존 케이지의 신작에는 모두 손을 든 모양이오"라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 있다. 문화적인 충격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반면 백남준은 이런 문화적 충격을 잘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 수용적 태도가 윤이상에겐 비범하게 비쳤고 훗날 예술가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독일 헤센주의 주도인 프랑크푸르트의 남쪽에 위치한 인구 14만 명에도 못 미치는 소도시 다름슈타트에서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가 탄생한 것이다. 한 사람은 음악가로 인정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고 한 사람은 음악가로 실패하며 존 케이지에게서 받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영감으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전향하는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통영에는 윤이상기념관이 있고 용인에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있다. 생전에 윤이상은 유럽을 중심으로 백남준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2004년, 통영국제음악제는 주제를 공간(eSpace)으로 정하고 미국에 있는 백남준과 공간을 초월한 비디오아트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다. 이미 윤이상은 영면한 상태여서 산 자와 죽은 자, 아시아와 아메리카, 과거와 현재 등을 상징화하는 공간 작품을 실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위성을 통해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지만 우리의 IT기술이 워낙 발전해 기술적으로나 비용적으로 훨씬 좋은 환경에서 공연이 가능하겠다는 판단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행사를 두 달 앞두고 백남준은 병석에 눕게 된다. 이후 병마와 싸우다 2006년 이승에서 만나지 못한 윤이상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고 말았으니 예술가의 생몰이라는 것도 참 덧 없는 게 아닌가. 저 세상에서 조우한 두 거장의 기운이 우리 문화예술계에 축복으로 내려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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