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가 포스트시즌에 들어가 각 팀별로 한해 농사를 풍년으로 만들고자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류현진 때문에 그들의 가을잔치에 관심이 더 가는 게 사실이지만 선수나 감독의 순간적인 판단이 경기를 수렁에서 건지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승부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찰나의 묘미에 지구촌이 들썩이기도 한다.

류현진과 같은 팀에서 뛰는 쿠바출신 외야수 야시엘 푸이그의 플레이는 시즌 내내 팬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가 막힌 허슬플레이로 수만 관중으로부터 환호를 받는가 하면 무리한 수비 동작으로 게임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 주어 역적이 되어 버리는 그야말로 냉탕온탕을 왔다갔다 하며 팬들의 반응도 극명히 갈렸다.

푸이그의 경기모습을 보면서 저 과유불급의 에너지를 어떻게 다룰까가 이번 포스트시즌 승패의 관건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매팅리감독의 신중한 플레이를 해달라는 주문 때문인지 첫 두 게임은 매우 부진해 보였다.

클래식음악계에는 거장에 대한 예우가 유별나다. 그래서 관록을 갖춘 이름 있는 악단의 연주에서 푸이그처럼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에너지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인생과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나는 안정되고 깊이 있는 울림으로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스포츠처럼 젊고 설익은 열정이 보여주는 역동성이나 반전의 드라마는 애시당초 기대하기가 쉽지 않고 그 자리에는 거장의 인생 전반에 걸쳐 누적된 천재성의 완결 그리고 노익장이 대신하게 된다.

올해 우리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로린 마젤이라는 두 거장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어떻게 보면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최근까지도 고령의 나이로 현역활동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지휘자들이다. 그들이 젊은 시절, 베를린필이 카라얀 타계 후에 후임자를 물색할 때, 유력한 후보자였던 마젤을 밀어 내고 당시로선 전혀 의외의 인물인 아바도가 낙점된 데 이어 로린 마젤이 빈 국립오페라극장 총감독으로 재직하다 하차했을 때도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바도였다. 마젤 입장에선 은근히 신경 쓰이는 상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뉴욕필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마젤은 특히 남한과 북한을 번갈아 방문하며 한반도 평화에 음악으로 기여하고자 했다. 우리에겐 첼리스트 장한나의 지휘선생이라는 별칭으로도 친숙한 마젤은 지적이면서 천부적 재능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다.

반면 아바도는 공부하는 지휘자로서 말러의 연주에 정통했으며 새로운 음악에 대해 늘 관심을 기울여 현대음악 해석에 탁월한 입지를 지녔었다. 위암 수술로 인생에 있어 중대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요양 차 머물게 된 루체른에서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니, 루체른페스티벌을 세계적인 음악제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바도를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지난 주말, 창원성산아트홀에선 정명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젊은 층에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성 있는 지휘자로 더 유명하지만 그는 원래 피아니스트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2위로 입상하고 서울시내를 카페레이드하고 박정희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던 일은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만큼 그 시절 국력에 비해 정명훈이 이룩한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바스티유를 거쳐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아시아 최고의 악단으로 만들려는 여정은 아직 그의 애국심만큼이나 끝나지 않은 열정으로 남아 있다. 믈론 30년만의 독주회를 바라보며 아직 그에게 노익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많이 이르지만.

예술혼을 불태우는 방식에 나이가 무슨 장애가 되겠냐 싶지만 간혹 클래식계의 거장에 대한 예우가 관객의 입장을 떠나 지나치게 시장구조에 의해 진행된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차세대 거장들이 줄을 서 기다리는 포디엄에 안전장치까지 해가며 겨우 지탱하듯이 음악을 이끌어 가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에 무작정 박수로 화답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고민해 봐야할 시점에 있는 듯하다.

어제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았다. 므라빈스키 이후 러시아 악단을 장기집권하고 있는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몸이 불편해 오지 못한 포디엄엔 부지휘자인 니콜라이 알렉세예프가 대신 했다. 공연을 마치고 나가는 관객들의 표정에선 새로운 거장의 탄생이 마냥 흐뭇한 듯했다.

노익장과 노욕은 어쩌면 백지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공연업계에서도 거장의 품격과 신예의 재기가 잘 어우러지는 배려와 기획이 절실해 보인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