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위숙 계룡수필 회원

거울을 본다. 검은 염색약이 덕지덕지 묻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삐쳐 있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머리모양에 빨간 가운을 입은 내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한 달에 한 번쯤 이런 몰골로 미장원에 앉아 잡지를 들춰보며 시간을 허비한다. 여러가지 색깔로 멋 내기 염색을 하는 아가씨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머리숱도 많고 너무 까만색이라 어쩐지 답답해 보인다며 거울을 보며 투덜거리던 때가 엊그제였다. 이제는 나이보다 앞질러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치려니 하고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족집게를 들었다. 그런데 갈수록 그 수가 많아지는 게 아닌가. 검은 머리를 가닥가닥 젖히면 하얀 갈치 떼처럼 흰머리가 넘실거린다. 몇 번이고 더듬거리다 손에 잡히는 순간 살짝 늦췄다가 잡아챈다.

흰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면 야릇한 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목이 뻣뻣하고 팔이 아프다. 게다가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눈을 치뜨고 있다 보면 이마에 주름이 생기니 그것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 예전에 어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흰머리에 현상금을 걸어 딸아이에게 내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는다. 비몽사몽간에 흑백필름으로 돌아간다.

내 머리를 정성스럽게 감겨준 다음 살살 빗겨 양 갈래로 곱게 땋고 끝에다 나비모양의 리본을 매어 주시던 어머니. 긴 머리를 감은 다음 양지바른 쪽마루에 한가롭게 앉아 얼레빗으로 빗어 말려 동백기름을 바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돌돌 말아 비녀를 꽂으시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경대 속에서 꺼낸 은비녀로 내 머리에 꽂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머니 연세가 깊었을 적에도 검은 머리였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머리가 빨리 세는 걸까.

하루 동안 천자문을 짓고 나서 백발이 되었다는 주홍사처럼 나도 머리를 써서 그렇게 되었다면 무슨 걱정이랴. 그렇다고 매창의 시조에서 보듯 밤새 머리가 세어질 만큼 아픈 그리움으로 사는 것도 아닐진대.

처음으로 내 손으로 머리에 물을 들이던 날이었다. 먼저 양쪽 신문지 몇 장을 넓게 펴고 하얀 비닐 망토를 걸치고 나서 양쪽 귀를 싸매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꼈다.

염색도구를 챙겨 거울 앞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염색약을 다 발라놓고 거울을 보니 우주인이 앉아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다 하지만 검은 물을 들이고 나니 열 살은 젊어 보였다. 진작 이렇게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보름만 지나면 밑머리가 흰 억새처럼 일제히 들고 올라왔다. 때로는 이도저도 귀찮아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살 거라며 파뿌리를 드러낸 채 외출을 해 본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고민이 있었냐며 그새 머리가 희었네’라며 한마디씩 던진다. 그런 날엔 왠지 풀이 죽고 말수도 적어진다.

머리에 하얀 노을이 드는데 마음은 소녀 적 그대로니 야속하기로 세월이로다. 울적한 마음에 탄로가를 읊조려 본다. 어느새 눈가가 축축하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눈물이 볼을 타고 입가를 적신다. 짭조름한 맛에 눈이 번쩍 떠졌다. 후다닥 일어나 거울을 보니 본래 검은 머리 그대로다. 흰머리와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징표라며 연연해하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꿈에서 백두옹을 만나 화들짝 놀라던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