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유병언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의 아내는 이미 구속됐고 장남도 호위무사라 불리우는 미녀와 함께 붙들리는 광경이 생중계 되듯 다뤄져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줄 것이라 여겨지는 운전기사도 자수를 했다하니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세모그룹쪽 상황은 크게 건질 것 없이 종결돼 가는 모양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끝에서 우리 공권력이 끊임없이 보여주는 무능력과 무소명에 신뢰를 잃었다. 매듭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추리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진짜 범인이 경찰이거나 검찰이거나 아님 그보다 더한 절대권력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신은 무서운 것이다. 국가 대개조다 뭐다 하며 입막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혹성탈출-반격의 서막'을 보면 유인원 우두머리인 시저가 유독 강조하는 어휘가 있다. 바로 신뢰(Trust)이다. 극중에서 유인원은 유인원끼리 인간은 인간끼리 신뢰가 깨어져 파국으로 치닫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오지만 어린시절 시저가 인간에게서 받았던 사랑이 결국 굳건한 신뢰를 가꾸고 지켜내는 원천이 됨을 알 수 있다. 신뢰는 언제든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부모자식간에도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동료간에도. 문제는 금이 가버린 신뢰를 회복할 만한 기반이 되어 있나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남북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을 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신뢰가 중요하다. 오죽하면 남북한 신뢰프로세스라는 용어까지 정책적으로 등장했겠는가. 하지만 작금의 세월호 국면에서 국가기관이 보여주는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들은 신뢰라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되돌릴 수 없이 경박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유병언씨의 사인과 관련해 자살이냐 타살이냐 자연사냐 등의 추측들이 난무하다. 국과수의 발표 자체도 속시원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간의 과정을 보면 곧이 믿으라고 하는 게 우습지 않는가. 현장 보존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마을 주민이 유류품을 가져가고 심지어 목뼈를 가져갔다 돌려주는 엽기적인 일까지 벌어지니 시신의 목이 달아난 상태였다 아니다의 설왕설래에 방점을 찍어 줄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오스트리아에 아이젠슈타트라는 도시가 있다. 헝가리 영토였던 시대에 이곳의 명문가인 에스테르하지家와 요제프 하이든의 돈독한 관계로 유명한 곳이어서 지금도 '하이든 잘'이라는 훌륭한 연주회장이 있는 곳이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家에서 30년간 후원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에 작곡된 새로운 시도들로 인해 하이든은 음악사에서 고전주의 음악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됐다. 하이든과 이 가문과의 일관된 신뢰는 하이든 사후에까지 이어졌는데 1809년 5월31일 사망한 하이든의 장례식은 공교롭게도 그날 나폴레옹군의 빈 점령 소식으로 간소하게 치룰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2세는 하이든의 생전 소망에 따라 유해를 자신의 가족묘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장을 위해 하이든의 무덤을 열어 보니 그의 머리가 사라진 채 몸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닌가. 이에 니콜라우스 2세는 즉각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 나섰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비서 로젠바움과 오스트리아 형무소장 페테르였다.

이들은 당시 골상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바흐·베토벤과 같은 천재들의 골상을 연구하던 중 도굴을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들로부터 하이든의 두개골을 인도 받았으나 페테르가 그 두개골이 하이든의 것이 아니고 진짜는 빈 음악가협회에 기증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고 만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계속해서 하이든의 두개골을 되돌여 받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145년이 지난 1954년 하이든의 탄생 200주년 기념묘를 만들면서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이든의 두개골과 몸이 145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엔 신뢰가 절실하다. 시저가 목으로 내던 탁하고 거친 소리, 트러스트. 트러스트가 귀에 쟁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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